[편집자레터] 책으로 만나 본 100년 전 최고의 글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구한말 지식인 명미당(明美堂) 이건창(1852∼98).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신간 『조선의 마지막 문장』(글항아리)에서입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글꾼이었다고 합니다. 임오군란 당시 대원군이 청나라에 압송되자 고종은 청 황제에게 바칠 주문(奏文)을 그에게 부탁하면서 “글을 짓는 데 그대가 꼭 필요하다. 글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 글자를 볼 때마다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릴 수 있도록 하라”고 당부했다지요.

강화도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0세에 사서삼경을 통독했고, 15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역대 최연소 과거급제자입니다. 그의 벼슬살이는 곧고 청렴했습니다. 26세에 충청도 암행어사로 부임했을 때는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의 은닉재물을 찾아내고 숱한 비행을 밝혀냈으며, 그의 행동이 과민하다고 의심하는 고종 앞에서 탐관의 만행을 조목조목 알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방관이 올바른 행정을 하지 않으면 이건창이 찾아간다”라는 말까지 생겨났답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그는 아직 낯선 인물입니다. 그가 살았던 구한말이 후세로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암울한 시기여서이기도 하고, 그의 문집 『명미당집』이 그동안 한글로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조선의 마지막 문장』은 대구의 재야 한학자 송희준(50) 선생이 수년에 걸쳐 『명미당집』을 완역해, 180여편의 산문 중 50여편을 골라 엮은 책입니다. 책에는 사육신과 김시습·김인후 등을 다룬 전기, 동생과 아내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 이름없는 민초들의 선행을 담은 글 등이 실려 있습니다.

그 중 ‘작문이론’은 특히 눈여겨볼 만합니다. “하나의 전형적인 틀을 만들어 놓고 달라진 대상의 인명이나 지명 등 몇가지만 바꿔쓰는 글짓기는 안된다”“속어 사용을 꺼릴 겨를이 없다. 다만 바른 뜻을 놓쳐버리는 것과 하고자 하는 말을 싣지 못했는가를 염려해야 한다” 등이 그의 조언입니다. 또 “고인의 말을 취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 이름과 고서(古書)의 이름을 써 자기의 글과 구별되게 해야 한다”면서 표절에 대한 경계의 메시지도 남겼습니다.

늘 마감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기자에게도 따끔한 일침을 놓습니다.

“많이 짓는 것이 많이 고치는 것만 못하다”는 청나라 문장가 위숙자(魏叔子)의 말을 인용하면서, “지은 글을 10번 읽어보고 10번 붓으로 써서 하자가 없을 때 비로소 좋은 글”이라고 충고합니다. 글을 쓴 뒤 “씹어보고, 깨물어보고, 삶아 익히기도 하고, 단련하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하고, 흔들기도 하고, 끌기도 하면서” 하자가 없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라는 말이지요. 혹 그동안 시간에 쫓겨 ‘데친’수준으로 내놓은 글은 없나, 새삼 돌아보게 됐습니다. 

이지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