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이미 자국 경지 면적 3배 확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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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호 18면

일본(22.4%)과 우리나라의 식량 자급률(27.8%)은 비슷하다. 어마어마한 양의 곡물을 수입해 오는 것도 닮았다. 일본은 곡물 수입량이 2600만t으로 세계 1위, 우리나라는 1500만t으로 5위다. 하지만 곡물 가격이 뛰는 바람에 물가가 상승하는 애그플레이션 상황에서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여유 있어 보인다.

해외 식량기지 건설에 팔 걷어붙인 일본·중국·대만

브라질 북동부의 열대 초원지대 세라도. 일본이 개발한 해외 식량기지 중 하나다. 일본이 해외에서 수입하는 콩 418만t 중 13.5%가 여기서 나온다. 1973년 미국 정부가 콩 수출을 금지한 것이 계기였다. 96%를 미국에서 수입하던 일본은 큰 타격을 입었고 다른 수입처를 찾던 중 세라도에 주목했다. 브라질 정부와 손잡고 ‘세라도 농업 개발 협력사업’을 시작해 23년간 불모지 33만㏊를 개발했다. 일본은 설비·영농자금을 현지 농가에 대출해주고 농업기술 전문가를 파견했다. 지금은 세라도 전체가 농업 중심지로 변모했고 브라질 전체 콩 생산량의 절반이 여기서 나온다.

브라질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 일본이 개발한 식량기지는 1200만㏊. 자국 경지 면적의 세 배에 달한다. 60년대 초 전 세계적으로 곡물 가격이 뛰면서 일본 내 축산업이 휘청거렸고 이때 해외 농업개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안상돈 농협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몇 십 년 동안 비싼 수업료를 내며 해외 농업개발을 한 일본은 이제 한국이 벤치마킹하기 힘들 정도로 앞서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현재 세계의 곡물시장은 남·북미에서 생산되는 식량자원을 갖고 동북아 국가들이 쟁탈전을 벌이는 상황이다. 김태곤 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은 곡물 메이저를 통해 ‘앉아서’ 구매해온 데 비해 일본은 ‘나가서 캐왔고’, 중국·대만도 근래에 식량기지 확보에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해외 식량기지 개발의 중심에는 ‘해외농업개발협회’가 있다.

농림수산성 산하 사단법인인 이 협회는 정부 예산으로 해외의 농장 개발사업을 지원한다. 민간 기업이 식량기지를 물색할 때 드는 초기 조사 비용의 절반을 대준다. 해외 식량기지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일본으로 가져오는 것이 조건이다. 이후 식량기지 개발이 확정되면 상대 국가에서 수출 제한 조치를 내리지 않도록 국가 간 양해각서를 체결한다. 민간이 주도하고 정부가 보조하는 형태다. 이기철 한국농촌공사 해외사업팀장은 “일본 정부가 협회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원하기 때문에 현지에서 자원민족주의에 따른 반감이 적은 편”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일본의 투자가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60년대 이토추, 미쓰비시 같은 종합무역상사가 인도네시아·호주 등에서 옥수수·수수 생산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카길·ADM 등 거대 곡물 메이저가 세계 각국의 저장·운송망을 장악하고 있어 자국으로 들여오기가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본은 80년대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해외 유통시설을 확보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먼저 제1 수입국 미국의 곡물 저장시설인 사일로와 엘리베이터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곡물 수집회사와 수출회사를 인수합병하거나 설립했다. 현재 일본으로 들어오는 식량은 우리나라의 농협에 해당하는 전농(全農)이 30%, 미쓰비시 등 종합무역상사가 70%를 담당한다. 다국적 곡물 메이저로부터 일괄 구매하는 한국과는 사뭇 다르다.

최근에는 중국·아르헨티나 등 전통적인 농산물 수출국이 수출을 제한하자 전략을 바꿨다. 수입처 다변화를 위해 다시 직접 재배에 나선 것. 이번에는 과거 종합무역상사들의 ‘나 홀로 개발’이 아닌 해외농업개발협회를 통한 민관 합동 개발이다. 2007년 11월 미쓰이 물산은 브라질 곡물 생산회사를 사들였다. 10만㏊의 농장을 가진 이 회사를 인수함으로써 미쓰이는 연간 콩 11만t, 옥수수 3만t에 달하는 곡물을 확보했다. 마루베니도 브라질 곡물상사 아그렌코로부터 10년간 곡물 우선판매권을 획득했다.

중국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인구가 급증하면서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처지가 변한 지 오래다. 늘어나는 콩 소비량을 감당하지 못해 남미 등지에서 콩을 수입하는 실정이다. 쿠바·멕시코 등에서 1년 단위의 계약재배 형태로 곡물을 들여오기도 했다. 하지만 안정적으로 식량자원을 들여올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개발이 덜 된 동남아로 눈을 돌렸다. 2007년 중국 정부는 필리핀 정부와 50억 달러를 투자해 120만㏊를 개발하는 내용의 양해각서를 교환했다. 토지를 25년 동안 장기로 빌려 여기에 쌀·옥수수·콩 등을 재배하는 것이다. 중국이 물류·수송 인프라에 투자하고 필리핀 현지의 노동력을 고용하는 조건이다. 대신 여기서 생산되는 쌀을 수출하는 것을 허용받았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중국 공기업 중 하나인 후후아 그룹은 5년 동안 인프라에 투자해 매년 옥수수 1400만t을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중국은 캄보디아·미얀마 등지에 식량기지를 개발하는 것도 검토 중이다.
이판용 농협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중국 정부의 강력한 주도 아래 공기업과 민간기업이 컨소시엄을 이뤄 참여했다”며 “중소기업이 단독으로 들어가는 한국의 개발 형태와 다르다”고 말했다.

대만도 동남아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미왕·미단·왕왕 등 식품 대기업들이 원가 상승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베트남·캄보디아 등지의 대규모 경작지 확보에 나섰다. 그동안 대만은 미국산 식량자원에 크게 의존해 왔지만, 곡물 확보에 어려움이 심해지자 수입처 다변화에 주력하고 있다.

정연수 한국농산물유통공사 타이베이 지사장은 “대만은 곡물 수입분에 대해 관세를 철폐하고 중국에 곡물을 수출해주도록 요청하는 등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병화 국제농업개발원장도 “과거에는 곡물 메이저의 독점 때문에 식량기지 개발이 어려웠는데, 이제는 동북아 국가들이 너도나도 동남아 개발에 뛰어들어 한국의 식량기지 개발이 쉽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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