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다 가문은 베이징-도쿄 ‘핫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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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1978년 8월 12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 소노다 스나오(園田直) 일본 외상과 황화(黃華) 중국 외교부장이 중·일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했다. 두 나라가 모든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무력·위협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 조약은 72년 국교 정상화 이후 가장 진일보한 양국 간 평화조약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중·일 공동성명(72년)이 두 나라를 잇는 ‘현수교’였다면 평화우호조약은 흔들림 없는 ‘철교’라고 비유했다. 이 조약을 이끌어낸 장본인은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사진) 당시 일본 총리였다.

후쿠다는 “일본과 중국은 아시아는 물론 세계의 평화 정착을 위해 지도자 역할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며 주변의 반대 여론을 물리치고 조약을 체결했다. 같은 해 10월 23일 도쿄에서 열린 평화우호조약 비준서 교환식장에선 후쿠다와 덩샤오핑(鄧小平) 당시 중국 부총리가 악수를 나눴다. 그때 후쿠다 총리의 비서였던 아들 후쿠다 야스오는 회담장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정확히 30년 뒤, 야스오는 총리가 돼 중국 정상과 새로운 중·일 공동문서에 서명하게 됐다. 그는 여러 모로 선친을 빼닮았다. 71세에 총리에 오른 것도 그렇고, 77년 ‘평화 독트린’을 발표한 아버지처럼 아시아 외교를 중시하는 정책도 닮았다.

이런 그의 집안 내력 덕분에 중국에선 야스오를 ‘우물을 판 사람의 아들’로 대접하고 있다. 중국 국무위원인 탕자쉬안은 물론 왕이 등 역대 주일대사 등과도 핫라인이 있다. 국회의원이 된 후엔 ‘중국통’으로 불리며 외교 전문가로 기여했다. 외무성 관계자는 “ 중·일 관계가 중요한 국면을 맞을 때마다 물밑 조정을 해준 사람이 후쿠다 총리”라고 말했다.

후쿠다 총리에게 이번 중·일 정상회담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여소야대 국회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이 번번이 좌절을 당하자 후쿠다 정권의 지지율은 18%로 추락했다. 후쿠다 총리는 이번 중국 외교를 지렛대 삼아 지지도를 만회한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일본 국민의 관심이 높은 기후변화 대책을 담은 공동문서를 정치문서와는 별도로 만들기로 했다. 후쿠다는 또 티베트 시위 강경 대처에 대한 일본 내의 비판 여론을 의식해 후진타오 주석에게 달라이 라마 측과의 비공식 협의 결과에 대한 설명도 요구할 계획이다. 그러나 올해 일본 열도를 뒤집어놓은 중국산 농약 만두 파동과 최대 현안인 동중국해 가스전 공동 개발 문제는 아직 회담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도쿄=박소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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