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당직과 예절의 소통 세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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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금은 늙고 병든 일개 시민으로 돌아간 프랑수아 미테랑 前프랑스대통령이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를 갑자기 방문한 것은 지난93년의 어느 늦은 가을날이었다.
76세의 노구(老軀)를 이끌고 포연 자욱한 잿빛 도시 사라예보에 도착해 그가 한 일이 대단한 건 아니었다.부상자들이 몰려있는 코소보 병원을 찾아가 다친 시민들의 손을 잡아주고,유엔군으로 나와 있는 프랑스 병사들을 위로한 게 전부 였다.
가을의 문턱에서 까마득한 과거의 일처럼 되고만 미테랑의 사라예보 방문을 떠올리며 우리의 세계화를 생각하게 된다.언제부턴가생활의 일부처럼 돼 있는 우리의 세계화란 것이 고작 「코끝의 세계화」는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다.
혹시 우리가 매일 떠드는 세계화가 코끝의 간지러움에도 참지 못할 정도의 그런 세계화는 아닐까.세계화를 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금방이라도 재채기로 변할듯한 코끝의 간지러움을 느끼게 된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모르면서 외치는 세계화,모든것을 나의 기준에 맞춰 놓아야 직성이 풀리면서 떠드는 세계화,보스니아 사태라면 「보」자만 들어도 신물을 내면서 말하는 세계화,양보와는 담을 쌓고 살면서 설파(說破)하는 세계화 ,남을 치고 지나가면서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않고 지나치면서 내뱉는 세계화…우리 주변에서 발견되는 코끝의 세계화의 공소(空疏)함에는 끝이 없는 듯하다.
일정한 반응을 얻어내기 위해 가해야 하는 최소한의 자극치를 가리켜 심리학이나 물리학에서는 역치(역値:threshold)라고 한다.우리가 말하는 세계화의 역치가 너무 낮은 것은 아닐까.조금의 어색함이나 낯섦,불편함,손해에도 금방 간 지러움을 느끼고,재채기를 터뜨리고야 말 정도로 역치가 낮은 것은 아닌가.
위험을 무릅쓴 미테랑의 사라예보 방문에 대해 외교적 로맨티시즘을 추구하는 미테랑式 외교의 단순한 제스처일 뿐이라고 폄(貶)한 언론도 없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사라예보 시민들의 고통에동참하기 위한 「연대감(連帶感)」의 표현이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세계화는 최소한 남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고,그것은상식과 예의의 원활한 소통,바로 그것이 아닐까.
裵明福〈국제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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