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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순이 엇갈린 혁신도시 바로잡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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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바둑에서 정석(定石)은 고수들이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확립한 최선의 수(手)를 말한다. 공격이나 수비나 정석의 모양과 순서대로 두는 것보다 더 나은 수가 없다고 고수들이 공인한 착점의 방식이다. 정석은 돌이 놓이는 자리와 순서를 함께 아우르는 말이다. 엉뚱한 곳에 돌을 놓거나 수순(手順)이 어긋나면 정석이 아니다. 돌이 놓이는 자리는 정석의 실질이요, 돌을 놓는 순서는 정석의 과정이다. 정석대로 둔 바둑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서로 잘 어울린다. 그 결과 나타난 바둑돌의 배치는 기하학적으로 균형 잡힌 모양을 보여준다. 당대의 고수들이야 기왕의 정석을 뛰어넘는 신수(新手)를 찾아 머리를 싸매겠지만 전문기사 아닌 바둑 애호가들로서는 과거의 기보를 연구하고 정석을 익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다.

바둑의 정석처럼 세상사에도 정석이 있다. 일을 처리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최선의 방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를 잘 해나가거나 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는 데도 정석이란 게 있지 않을까. 서로 잘 어울리는 정치, 효과적으로 의도했던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정책을 펼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을 정석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혹여 바둑처럼 고수들이 미리 확립해 놓은 정석이 없더라도 나름대로 가장 나은 길을 찾는 노력은 헛되지 않다.

요즘 새 정부가 하는 일을 보면 정석을 모르는 바둑 초보가 무작정 바둑돌을 놓는 듯해서 안쓰럽다. ‘혁신도시’ 뒤집기가 그렇다.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가 막판까지 안간힘을 쓰며 밀어붙였던 혁신도시를 바로잡겠다고 나섰다. 수도권의 공공기관을 인심쓰듯 지방에 나눠주는 혁신도시가 문제가 많다는 것이야 익히 알고 있던 일이다. 정권이 바뀌어 새 정부가 이전 정부의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데야 뭐랄 것이 없다. 그런데 그 바로잡는 일이 어설프기 짝이 없다는 얘기다. 우선 일을 처리하는 수순이 영 뒤죽박죽이다. 혁신도시의 문제점을 거론한 방식부터 당당하지 못했다. 혁신도시의 사업효과를 뻥튀겼다는 감사원 보고서가 새나오고, 사업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국토해양부의 보고서가 슬며시 흘러나왔다. 뭐가 구린 데가 있어서 정부의 정책으로 떳떳하게 발표하지 못하고 뒤로 어물쩍 흘렸을까.

당장 지방에서 거센 반발이 나왔다. 전국혁신도시협의회는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하루 아침에 혁신도시를 무효화하면 누가 정부를 믿고 따르겠느냐”며 목소리를 높였고, 야당에선 혁신도시를 철회할 경우 엄청난 국민 저항에 부닥칠 것이라는 험악한 말까지 나왔다. 심지어 여당인 한나라당으로부터도 당정협의도 없이 혁신도시 재검토 방안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는 질타가 이어졌다. 반발이 커지자 국토해양부 장관은 “재검토는 없다”며 슬며시 물러섰다. 이 모두가 뻔히 예상할 수 있는 반응과 대응이다. 다만 수순이 엇갈리면서 반발을 키우고 바로잡는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을 뿐이다.

수순을 되짚어 복기해 보자. 혁신도시를 바로잡을 요량이었다면 우선 실태를 면밀히 조사한 후 어떤 방식으로 개발할 것인지에 대한 복안을 미리 강구해 두었어야 했다. 그저 문제가 있으니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식의 안이한 보고서를 언론에 흘릴 일이 아니다. 충분한 보완책을 준비해 국민 앞에 내놓아도 쉽지 않았을 사안을, 대안도 없이 덜컥 던져놓았으니 불난 집에 부채질한 꼴이다. 흡사 일을 성사시키자는 게 아니라 망치려고 작정한 모양새다.

혁신도시는 분명히 문제가 있고, 어떤 식으로든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한다 해서 올바른 해법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노무현 정부가 잘못한 정책을 뒤집기만 한다고 해서 새 정부의 업적이 쌓이는 게 아니다. 노무현 정부가 박아놓은 대못과 말뚝을 뽑기만 하면 대못 자국과 말뚝 자국만 남는다. 뽑은 자리에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하려면 세심한 배려와 숙련된 솜씨가 필요하다. 정교한 수순을 밟아야 함은 물론이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