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한국현대사>41.독립운동가 金山 재조명 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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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김산(본명 張志樂)이 83년 「일본간첩」이라는 혐의를 벗고 복권되는데 가장 큰 노력을 한 사람은 김산의 유일한 핏줄인 고영광(高永光.58)씨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 성(姓)을 따라 조영광(趙永光)이라 불렸지만 45년 자오야핑(趙亞平)이 재혼하자 계부의 성을 따라 고영광이라 불리게 됐다.高는 57년 톈진(天津)난카이(南開)대학을 졸업하고 하얼빈공대 교원으로 있다가 78년 베 이징으로 와지금까지 국가계획위원회 과학기술사에 근무하고 있다.
高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라면서 마을 아이들과 싸움이 일어나면 「고려 방망이」(高麗棒子)라고 욕을 얻어 먹으면서 자기가조선사람과 관계된다는 것을 짐작했다고 한다.
45년 어머니를 따라 공산당통치지구에 가 공부하면서 비로소 아버지가 조선혁명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그리고 37년 옌안(延安)에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도 읽어보았다.
『아들을 낳았다니 매우 기쁩니다.아이가 자라면 백의동포의 후손이라는 것을 꼭 알려 주시오.우리 백의민족은 누구나 동정해주지 않는 불쌍한 민족입니다.오직 자기 힘으로 무기를 들고 견결히 싸울 때만이 독립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아이가 크면 군대로보내 싸움터에 나가게 해주시오.』 38년 김산이 죽었기 때문에이것은 사실상 김산이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 됐다.
高는 70년대에 김산과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을 만나 아버지에게 씌워진 「일본간첩」혐의가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당중앙조직부에 이 문제의 재조사를 요구했다.또 당시 중앙조직부장으로 있는 후야오방(胡耀邦)과 광저우(廣州)봉기의 지도자였던 예젠잉(葉劍英)에게도 같은 내용의 편지를 올렸다.
마침내 83년 高씨는 중앙조직부로부터 『장지락동지는 당에 충성한 혁명자』라는 평가와 『명예를 회복하고 당적을 회복한다』는결정을 얻어냈다.
高씨는 김산의 명예회복이 이뤄진 뒤 그의 유언에 따라 두 아들과 함께 한족에서 조선족으로 개정했다.그는 『나는 조선족의 위대한 혁명가 아버지를 가진 것을 대단한 명예로 생각한다.다만아버님이 아직 「혁명열사」로 추인되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다』고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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