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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랑방>성공한 문학작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20년쯤전 영국(英國)더 타임스지의 문예판(TLS)은 창간 75주년을 기념해 「명성(名聲)의 재평가」라는 제목의 대대적인특집을 마련한 일이 있었다.학계.예술계의 석학(碩學)과 저명인사들로 하여금 지난 75년간 과대평가됐거나 과소 평가된 저서와저자를 가려내게 하자는 의도였다.
과소평가됐다고 지적된 저서와 저자는 개인적인 안목이나 취향에따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과대평가됐다고 지목된 저서와 저자 가운데는 「불후의 명작」혹은「문호(文豪)」로 꼽혀온 작품과 작가들이 즐비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예컨대 톨스토이의『안나 카레니나』는 「순전한 난센스」고,사르트르는「지적(知的)인 독선자」이며,D H 로렌스의 작품들은 「기계적이고 과장된 추악한 작품들」이라는 식의 혹평이었다.이밖에헤르만 헤세.앙드레 지드.생텍쥐페리.토마스 만.조 지 오웰등도과대평가돼 온 작가들로 거론됐다.특히 어떤 비평가는『앞으로 75년후면 솔제니친이나 솔 벨로같은 작가들이 대표적인 과대평가 작가들로 꼽힐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이 특집은 세계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한 명작들과그 작가들을 가차없이 깎아내렸다는 점에서 세계문단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그렇다면 그들 작품에 「명작」이란 관(冠)을 씌워준 것은 누구인가.독자도 비평가도 아니고 학자 도 사가(史家)도 아니며 작자 자신은 더더욱 아니다.성공작이냐 실패작이냐,혹은 명작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객관적 판단기준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발표된지 수십년 수백년후에 숨겨진 가치가 새로 발견되어 재평가되는 작품들이 많은 것도 그 까닭이다.
널리 많이 읽힌 것이 성공작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몇몇 비평가들이 「뛰어난 작품」이라 추켜세웠다 해서 당장 명작의 반열에 올라서는 것도 아니다.한데 요즘 우리 문단에서는소설 『태백산맥』이 검찰에 의해 「성공한 문학작 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해서 화제다.이 작품의 국가보안법 위반 여부를 수사중인 검찰이 이적성(利敵性)혐의는 충분하지만 「3백50만부가 팔리는등 베스트셀러로 국민적 심판을 받은데다 성공한 문학작품 내용중 일부만을 문제삼아 처벌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판단에 따라」 기소유예 처분키로 했다는 일부 보도가 화제의 초점이다. 문학작품을 법의 심판대에 올려놓고 범법 여부를 가리는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지만 「베스트셀러이며 성공한 작품이기 때문에」 처벌치 않겠다는 검찰의 방침이 도무지 고소(苦笑)를 자아내게 한다는 것이다.그 이유라는걸 뒤집어 놓고 보면 「만약베스트셀러도 성공작도 못됐던들」 이 작품은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어마어마한 죄목을 쓰고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됐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성공작」 여부와 범법 여부가 어떤 함수관계에 있는 것인지,어떤 문학작품도 검찰이 성공작이라 판단하면 그대로 성공작이 되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검찰의 판단대로 성공작이냐 아니냐를 따지자는 것도 아니고 「성공한 문학 작품」이 면죄부의 이유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자는 것도 아니다.예술작품의 성공여부를 가리는 것이 과연 검찰의 몫이 될 수 있느냐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성공한 문학작품」이라는 표현을 곰곰 씹어보면 면책권을 부여한 「성공한 쿠데타」와 어찌 그리 닮았는지 자못 신기할 지경이다.검찰의 판단이 「베스트셀러=성공작」이라는 등식(等式)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앞으로 어떤 음란소설도 베스트셀러 가 되기만하면 문제삼지 않을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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