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가 ‘재판의 국경’도 허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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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호 22면

필자가 한국에 오기 전 미국의 한 로펌에서 공익활동의 하나로 돈 파라디스라는 사형수를 10년간 변호했다. 천국(파라다이스)이라는 이름과 달리 그는 ‘지옥의 천사들’이라는 갱단에 소속된, 점잖지 못한 사람이었다. 거칠게 살던 그는 끔찍한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아이다호주 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결국 그는 무죄로 풀려났는데, 항소심에서 제기한 주장 중 하나는 살인 사건이 워싱턴주에서 발생했으니 아이다호주는 재판 관할권이 없다는 것이었다. 즉 그가 살인을 저질렀다 치더라도 아이다호주에서 저지른 것이 아니니 아이다호주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법의 속지성(屬地性)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입법부는 헌법의 한계 내에서 민법·형법·행정법 등 세분된 여러 종류의 법을 만들어 그 나라 국민과 그 나라에 있는 외국인에게 적용하도록 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여러 나라가 모여 인종학살 범죄와 전쟁범죄를 재판하는 법원을 만들면서 국제적 관할권이란 개념이 발전했다. 가장 잘 알려진 예가 나치 전범에 대한 뉘른베르크 재판이고, 극동에도 일본 전범들을 재판하기 위한 국제군사재판소가 설치되었다. 둘 다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이 세운 법정이다. 최근에도 이 원칙이 적용되고 있어 유엔 감독하에 옛 유고슬라비아와 르완다의 반인도적 범죄에 관한 국제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2002년 국제조약에 따라 설치된 국제형사재판소는 조약국의 국민이 다른 조약국에서 저지른 범죄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의뢰한 사건에 대해 관할권을 가진다.

개별 국가가 국경을 넘어 관할권을 주장하는 예도 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입안한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해 이스라엘에서 반인도적 범죄로 재판을 벌인 것이 대표적인 예다. G8 국가들은 자국민이 외국에서 미성년자를 상대로 성행위를 한 경우 자국 에서 처벌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 섹스 관광을 처벌하고 있다.

관할권의 확대가 반인도적 범죄나 아동 범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가 진행되고 세계경제가 통합되면서, 점점 많은 나라가 비즈니스와 관련된 행위에 대해서까지 국경을 넘어 자신의 법을 집행하려고 한다. 미국은 특히 비즈니스 분야에서의 위법 처분에 적극적으로 그 관할권의 확대를 시도하고 있다. 두 달 전 엔론 사건과 관련하여 영국인 2명이 미국으로 강제 소환된 후 기소 전 협상 과정에서 사기죄를 시인하는 일이 있었다. 또 영국 사업가가 미국 반독점법을 위반하여 담합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미국으로 강제소환을 안 당하고 버티고 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도 미국의 증권법을 미국 밖에서 집행하기 위해 다른 나라 증권 당국과 협조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 회사와 사업가도 미국에서 유죄를 받은 적이 있다. 반도체 담합 사건에서 여러 한국인이 반독점법 위반으로 징역형과 벌금형을 받았다.

한국도 이런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비타민, 흑연봉 사건 등 한국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외국인의 담합 사건을 적극적으로 처벌해 왔다. 최근 임명된 공정위 위원장도 공정거래법의 역외(域外) 적용을 강화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공정위는 미국·유럽·일본 등지의 경쟁 당국과 활발히 협조하고 있고, 각국의 경쟁 당국은 그들의 경쟁법과 집행활동을 조율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다. 나날이 강화되고 있는 ‘법의 세계화’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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