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가 빚은 도자기를 설명하고 있는 조정현씨.
“흙은 무생물이라고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가만히 귀기울여 보면 흙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그럼 깨닫게 되죠. 아, 이 흙은 이런 도자기가 되고 싶어하는구나. 그렇게 도자기를 빚는 거예요.”
졸업 후 모교인 이화여대에서 40여 년간 후학 양성에 힘써 왔고, 현재는 명예교수다. 하지만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계속 흙을 만지고 물레에 앉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그를 뿌듯하게 하는 게 또 하나 있다. 지난달부터 한국국제교류재단 문화센터에서 ‘흙, 불 그리고 아름다움’이라는 제목으로 선보이고 있는 전시회다.
세계 최대<2219>최고 도자기 보고(寶庫)인 영국 국립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의 소장품 중 117점이 한국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 소장품의 첫 해외 나들이에 조 교수가 산파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게 전시회 관계자의 귀띔이다. 아니나 다를까, 전시품 설명에 여념이 없는 그다. “피카소가 도예에도 열정을 갖고 있었다는 거 아시나요? 이번 전시회에선 피카소가 직접 빚은 도자기도 감상할 수 있고, 아시아·유럽 도예 전통도 한눈에 볼 수 있지요.” 다음달 9일엔 전시회장에서 ‘한국 도예의 전통과 변환’이란 주제로 강연을 한다. ‘도자기 읽어주는 할머니’인 셈이다.
조 교수는 여러 종류의 한국 도자기 중에서 특히 옹기에 조예가 깊다. 그런데 살짝 외도를 한 적이 있다. 이화여대 교수 시절 서양 도예를 배우러 미국 남일리노이대에 간 것이다. “1970년대엔 현대 도예는 곧 서양 도예라는 인식이 팽배했죠. 전통의 소중함을 몰랐던 거죠. 서양 도예의 본고장인 미국에 가서 정식으로 배워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결과는 외려 한국 전통의 중요성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청자의 상감기법을 선보였는데, 다들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곧 전통 기법을 현대 도예에 응용하기 시작했어요.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킨 거죠.” 그렇게 빚어낸 그의 도자기들은 세계 곳곳의 박물관에 있다.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을 비롯, 미국·유럽에서 그의 도자기를 만날 수 있다.
그는 옹기의 소박한 멋에 끌린다고 했다. “백자와 청자가 곱게 단장한 여인이라면 옹기는 나름의 멋을 간직한 화장기 없는 얼굴의 아낙네예요. 무엇보다 귀족부터 서민까지 모두 써왔던, 가장 민주적인 도자기이기도 하죠.” 흙을 ‘정복’해 빚어내는 서양 도예의 전통과는 달리, 흙 본연의 자연스러운 멋을 느낄 수 있기에 옹기가 더욱 소중하다는 말도 덧붙인다.
글·사진=전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