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이민시대>4.조기은퇴한 "리치 코리안"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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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부자들이라고 다 풍요로운 생활만을 목적으로 이민오는 것은 아니다.즐기기 위해서라기보다 「살기 위해」 탈출한 사장님도 있다. 『공무원에게 뜯기고 종업원에게 시달리고….스트레스에 쓰러질것만 같아서 이민을 결심했다.』 밴쿠버 교외의 세미 퍼블릭 골프장인 포트 랭리에서 평일 오후 라운딩하고 있던 朴모(49)씨의 말이다.
대구에서 월 매출 3억원대의 주방용품 제조공장을 운영하던 朴씨는 92년 한국을 떠났다.
-상납할 곳이 그렇게 많았나.
『구청.세무서.경찰.보건소.환경관계 부서….같은 기관에도 몇군데씩 별도로 상납을 해야 했다.세어보니 꼭 27군데였다.』 -불법이 있으니까 상납했던 것 아닌가.
『예컨대 환경문제를 보자.6천만원 짜리 집진기를 설치했고,폐수 처리시설도 완벽하게 했다.그래도 공무원들이 찾아와 무슨 규정을 위반했으니 업주가 구속될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는다.규정을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술을 사고 돈 봉투를 쥐어줘야 했다.대구 공단에는 주방용구 제조업체가 10여곳 되지만 집진기.
폐수처리 시설이 아예 없는 곳이나 심지어는 무허가 업체도 있었다.제대로 하려는 회사에서 뭐 적발할게 그렇게 많다는 것인가.
』 -세금은 제대로 냈나.
『세금은 매출액의 10%다.이익이 10%가 안되는 데 어쩌겠는가.세무서에 돈을 주고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직원들에게시달렸다고 하는데.
『걸핏하면 술타령을 하고 지각.결근이 예사다.사람이 없어 한단계가 중지되면 공정 전체가 멈추니까 혹시라도 그만둘까봐 야단도 못친다.직원 한명은 운전면허 시험을 친다고 5차례나 결근하더니 드디어 면허를 땄다며 차 살 돈을 빌려달라 고 요구해왔다.3백만원을 빌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민을 결심하게됐나. 『배달나간 직원이 수금을 끝내고 돌아올 때까지 매일 밤12시 넘도록 회사를 지켜야 했다.육체적.정신적으로 너무나 피로했다.이러다간 죽겠다 싶어 이민을 결심했다.』 -이젠 은퇴한것인가. 『여행사와 잡화점등에 투자를 해놓고 있고 서울에도 친구들과 합작으로 하는 사업이 있어 아주 은퇴한 것은 아니다.그래도 매일 시달리는 일에서 해방되니 살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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