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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경영권 분쟁이 준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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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대통령 탄핵을 두고 국회에서 여야가 극렬히 대치했던 12일, 워커힐 호텔에서도 SK㈜ 경영권을 두고 국내자본과 외국자본 간 힘 대결이 있었다. SK 측이 가까스로 경영권 방어에 성공했으나 이 일을 계기로 외국자본의 국내기업 지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재벌 총수의 전횡을 막기 위한 제도를 강화하다 보니 외국자본이 국내 기업의 경영권을 쉽게 가져갈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 자업자득 탓 하기엔 문제 심각

소유지분이 20%도 되지 않는 총수 일가가 순환출자를 통해 계열사를 지배했으니 자업자득이라고 탓하기에는 문제가 심각하다. 기업이 경영권 방어에만 급급하다 보니 투자는 뒷전이고 실업자 양산과 내수침체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경영권이 취약해진 데는 재벌의 욕심뿐 아니라 정부 정책과 국민 정서도 한몫 했다.

외환위기 이전만 해도 우리는 기업가에게 경영권을 보장해 주는 대신 소유분산을 요구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실시한 1974년 5.29 기업공개 조치가 대표적인 예다. 그 당시 기업가는 은행 차입에 의존해 사업을 했고 소유권은 가족끼리 나눠 가졌다. 그들에게 정부는 부(富)의 사회적 분배, 주식시장 발전, 노사화합을 명분으로 주식공개를 유도했다. 말이 유도이지 사실상 불이행 기업에 대해 공개명령 등 강제조치가 이어졌다. 소유를 분산시킨 대가로 경영권은 철저히 보장해 주었다. 다른 사람이 경영권을 위협하면 감독당국이 나서 자금출처와 세무조사를 담당해 줬다. 재벌들이 적은 자본으로 문어발식 사업을 확장하기에 좋은 환경을 마련해 준 셈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세상도 정부도 바뀌었다. 투자한 만큼만 경영권을 행사하라고 소액주주들이 야단이다. 정부도 총수지배 체제를 개선한다고 적대적 인수.합병(M&A)을 허용했다. 경영권을 방어하려면 계열사를 팔아 증자를 해야 하는데 살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다. 그 사이 핵심기업만 삼키면 모든 계열사가 호박덩굴처럼 손에 들어오니 외국자본 입장에서 볼 때 우리 기업은 매력적인 M&A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안타깝게도 간단한 해결책이 없는 듯하다. 자본시장 개방으로 외국자본과 국내자본을 차별할 수 없게 된 이상 외국자본의 국내기업 지배를 막으려면 국내자본의 M&A도 금지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기업지배구조 개선은 기대하기 어렵다. 일례로 SK 사태 이후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완화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계열사 간 순환출자를 통해 적은 지분으로 경영권을 방어하자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소액주주의 돈을 총수 지배력 강화를 위해 쓰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주장이다.

다행스럽게도 SK 주총을 보니 지배구조 개선과 국내 경영권 보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도 있을 듯하다. SK가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은 연기금.투신사 등 국내 기관투자가들이 SK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선진국에서도 기관투자가들이 주주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투자 규모가 큰 기관투자가들은 주식을 함부로 시장에서 매각하면 손해를 보게 된다. 주가 하락을 스스로 부채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장상황에 수동적으로 반응하기보다 경영자를 교체하는 등 대주주로서 경영구조 개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가관리의 역할을 한다.

*** 외국선 기관투자가 역할 커

이에 반해 국내 기관투자가들은 주식투자에 소극적이거나 주식을 보유해도 의결권 행사에 무관심해 왔다. 기관장의 입장에서 보면 임기 중 위험을 감수하며 주식투자를 하기보다 안전한 채권에 투자하는 것이 능사였다. 우리는 주식을 사지 않으면서 외국인이 경영권을 가져간다고 비난하는 것은 모순된 처사다. 국내 기관투자가들이 주식투자 비중을 늘리고 경영감시 기능을 강화하면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함께 국내 경영권도 보호할 수 있다. 무조건 외국자본을 배척하자는 것이 아니라 같은 값이면 우리 손으로 국내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하자는 뜻이다. 이번 주총에서 SK를 지지했던 국내 금융기관들이 단순히 애국심에서가 아니라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면서 의결권을 행사했기를 기대한다. 물론 기업 스스로도 바뀐 세상에 빨리 적응해야 한다.

이창용 서울대 교수.경제학 한국채권연구원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