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외국 해커 막아내는 애국 해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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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해킹대회 ‘코드게이트2008’을 주최하는 해커 홍민표씨. 홍씨는 “이번 대회를 계기로 해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변화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진=김상선 기자]

#2007년 11월. 중국 해커들이 한국의 공공기관과 기업 웹사이트를 무차별 공격한다는 정보가 한국 해커들에게 입수됐다. 이른바 ‘제로 데이’ 공습 정보였다. 즉각 홍민표(30)씨를 비롯한 한국 해커들은 평소 친분이 있는 중국 해커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중국 내 일부 범죄 크래커의 계획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한국 해커들은 “한·중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한국 공격 계획을 막아 달라”고 중국 해커들에게 강력하게 요청했다. 설득은 성공했다. 중국 크래커들이 한국 공격을 철회한 것이다.

#2008년 2월. 컴퓨터 운영체제인 ‘리눅스’에서 치명적인 결함이 발견됐다는 자료가 외국에서 공개됐다. 한국에는 아직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국내 최대 해커 집단 중 하나인 ‘와우해커’(http://www.wowhacker.org)는 이 자료를 분석해 공개했다. 결함을 쉽게 보완하는 방법을 사이트에 게시도 했다.

◇“해커에게도 조국이 있다”=“우리가 이런 일들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몰라요. 범법자는 아니지만 여전히 음지 인생인 셈이죠.”

와우해커의 운영자이자 국내 최고수 해커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홍민표씨는 한국에서 해커라는 존재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기관이나 기업체 사이트의 보안상 결함을 지적해 주면 보안 담당자들은 오히려 화를 낸다”고 소개했다. 그는 “고소하겠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고 한다.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회사에선 해커들에게 새로 개발한 시스템 소스를 공개하고 문제를 지적받으면 감사해하는데 한국에선 고맙다는 얘길 들은 적이 없다”며 씁쓸해했다.

홍씨와 같은 해커들은 몇 년 전까지도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다. 굵직한 해킹 사건이 터질 때마다 참고인으로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상당수 해커들은 국가에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데 아직도 오해의 대상”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홍씨는 “대부분의 해커 집단은 크래커로 오인되는 것을 꺼려 엄격한 내부 규율을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와우해커처럼 공개된 해킹 그룹은 6~7개 정도. 그룹 멤버들 중엔 대학 연구원과 학생·직장인이나 정보기술(IT) 관련 사업을 하는 이도 있다. 2000년대 초반엔 15개 정도의 메이저 그룹이 있었다. 홍씨는 “기업체 정보통신 부문 전문가로 채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해커들이 가진 기술만큼 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해 숫자가 줄고 있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정보통신 기술을 창조적으로 실험하는 해커들이 준다면 사회의 IT 역량도 약해지는 셈”이라고 그는 말했다.

◇“국산 기술로 외국 바이러스 막겠다”=홍씨가 해커의 길로 들어선 때는 중3 때인 1993년. 집에서 인터넷 포스트를 운영하던 홍씨는 ‘전 세계 사람들을 우리 집에 불러 모을 수 없을까’를 꿈꾸게 됐다. 친구들과 어울려 IT 기술을 익혀 나갔다. ‘해커’라는 말을 처음 접한 것도 그 시절이었다. 대학도 컴퓨터 관련 학과로 진학했지만 학업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IT 업체에서 일하는 재미에 빠져 1학년 두 학기 연속 ‘올(all) F’를 받고 제적됐다.

이후 직장생활을 하며 재입학해 올해 초 11년 만에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홍씨와 또래의 와우그룹 소속 해커들은 90년대 후반 각종 국내 해킹대회에서 우승을 휩쓸었다.

◇세계 정상 해커들 모인다”=와우해커는 14일부터 서울 삼성동 코엑스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열리는 ‘코드게이트 2008’의 대회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코드게이트 2008’은 보안 전문업체 ‘소프트포럼’이 주최하는 총상금 1억원 규모의 해킹대회다. 전 세계 600여 팀이 참가해 75대1의 경쟁을 뚫고 8팀이 본선에 올랐다. 본선 참가 팀은 14~15일 24시간 동안 단계별로 와우해커가 출제한 해킹 관련 문제를 풀어 나간다.

15일 열리는 보안 콘퍼런스엔 각국 정상의 해커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세계 최고 해킹 그룹으로 꼽히는 ‘데프콘(미국)’의 대표 제프 모스와 중국의 대표 해킹 그룹 ‘엑스콘’의 리더 캐스퍼와 린지, 일본 ‘블랙캣’ 그룹의 전 대표 다카마 등이 모여 최신 보안 이슈를 논의한다. “이번 대회를 통해 해커에 대한 일반인들의 부정적 이미지를 씻었으면 한다”는 것이 홍씨의 바람이다.

글=이충형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해커와 크래커= 한국정보보호진흥원은 ‘컴퓨터 시스템 내부 구조 등에 심취해 이를 알고자 노력하는 사람으로서 대부분 뛰어난 컴퓨터 및 통신 실력을 가진 사람들’로 해커를 정의했다. 크래커(cracker)는 해킹 실력을 범죄에 악용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해커를 크래커와 구별하기 위해 ‘화이트(white) 해커’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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