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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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번 여름 휴가에 초대하면 어떨까요?』 아리영은 최교수를 농장으로 부를 생각을 했다.아버지와 자연스레 사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젊었다.머리만 희끗할 뿐 정년퇴직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만큼 탄력성이 있었다.마땅한 여성만 있으면 재혼하는것이 여러모로 바람직했다.
그래야 아리영 자신도 안정될 수 있을 것같았다.
아버지와 남편을 나란히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차라리 고통에 가까웠다.세련된 아버지와 미숙한 남편.매사에 비교가 되는 것이다.그 결과는 번번이 비참했다.
때와 장소와 경우에 따라 능하게 옷을 입어내는 아버지와 셔츠단추를 제대로 제 구멍에 끼지 못하기 일쑤인 남편과….
커피도 곧잘 끓이고 샌드위치 쯤은 간단히 만들어 손수 식탁을차려 여인네의 바쁜 일손을 덜어주곤 하는 아버지와 자기 수저 하나 챙기지 못하는 남편과….
고전의 명문(名文)이나 경구(警句)를 활용하며 질 높은 대화를 꾸려가는 아버지와 그 출전(出典)은 커녕 의미조차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남편과….
『…이것이 최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한 그것은 최악이 아니야.
』 젖소 여러 마리가 병에 걸려 타격을 입었을 때 아버지는 이런 말로 사위를 위로했다.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나오는 유명한 한마디였고,제2차세계대전때 독일의 공격에 시달렸던 영국의 수상 처칠이 인용했던 한마디였다.
남편은 묵묵히 선 채 장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셰익스피어도 젖소 여러 마리 잃어본 적이 있을까요?』 옆에서 거들다 말고 아리영은 입을 다물었다.도무지 이런 식의 대화가 남편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진지하고 건강하고 전문지식도 있고 「남편」으로서의 조건을 나무랄 데 없이 갖춘 이 남자가 왜 이렇게 숨막히도록 답답하게 여겨지는가.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재혼이라도 해서 다른 여성의 남편이 되어 아리영의 생활권 밖으로 나가버린다면 한결 홀가분할 듯했다.
식탁 위에 남편이 급히 먹다 던지고 간 사과 한 알에 아침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껍질째 힘껏 베어먹은 잇자국이 패어 있다. 왠지 몸서리쳐졌다.
싫었다.이렇게 막 사는 행태가 싫었다.
껍질째 사과를 베어먹건,그것을 식탁 위에 내던지건 뭐 그리 대수인가.그러나 아리영은 자신의 살이 베인 것같은 고통을 실제로 느꼈다.
수화기를 들어 서울의 최교수에게 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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