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풍백화점 붕괴-딸.어머니 잃은 구정진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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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엄마…,혜영아….내 목소리가 들리니? 대답좀 해다오…,제발,제발….』 네살된 늦둥이 딸과 친정어머니를 함께 잃은 구정진(具貞辰.41.여.산부인과 전문의)씨는 사고 엿새째인 4일 오후에도 A동 지하1층 서점부근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엄마와 딸을 불러보지만 겹겹이무너져 쌓인 서점부근 상판에 책들만 어지럽게 흩어져 있을뿐 아무런 대답도 없다.유난히 책을 좋아했던 혜영(惠英.사진)이.
사고당일 혜영이는 유치원을 마치고 아빠.엄마가 운영하는 병원에 찾아와 『밖에 놀러가자』고 보채다 마침 병원에 들른 외할머니와 함께 오후5시30분쯤 책을 사러 백화점에 간뒤 행방불명이다. 『책을 읽어달라고 조르는 딸에게 내일 꼭 읽어주겠다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는데 그게 마지막 약속이라니….』 具씨는 종일 환자진료로 피곤하다며 사고 전날밤 읽어주지 못한 책위에 겹쳐 아련히 떠오르는 딸의 모습에 가슴을 쥐어뜯었다.
대학 1년생인 큰 아들과 고교 3년생인 딸과 10년 터울인 막내딸 혜영이는 서른일곱에 어렵게 얻어 가족.친지들의 귀여움을독차지했다.유난히 총명해 두살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했고 백화점에 쇼핑가 엄마가 옷을 사주겠다면 『옷은 싫어.
어차피 1년 지나면 작아지잖아.난 책만 사면 돼』라고 의젓하게 말하곤 했다.
아무리 「내리사랑」이라고 하지만 혜영이와 함께 실종된 친정엄마(鄭애경.65)까지 생각하면 具씨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긴다.
『뒤늦게 얻은 손녀라 그런지 「하루라도 보지 않고는 못살 것같다」며 하루가 멀다하고 병원을 찾았는데….혜영이를 감싸 안은채 탈출하려다 눈도 편히 감지 못하셨을 거야.』 딸 하나만 위해 헌신적인 희생을 아끼지 않던 어머니는 具씨가 대형병원에 근무하다 지난 4월 불임.시험관아기 시술 전문병원을 개원했을 때『난 정말 너희들로 인해 행복하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金玄基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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