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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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제2부 불타는 땅 떠난 자와 남은 자(23)『이것 저것 생각하니… 피가 끓는다.』 저녁을 먹고 나서 밖에 나와 있던 장규가 방파제 쪽을 바라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숙사 앞에 나와 앉아 있던 김씨가 물었다.
『뭘 그렇게 혼자 시부렁거리누?』 『세상 돌아가는 꼴,열불이나서 살겠소? 하늘하고 땅이 맷돌질을 하든가 해야지.이게 어디사람 사는 꼴이냐 그거요.』 『이 사람아.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그런 소리 함부로 하는 거 아녀.이런 때는 죽은 체 엎드려서 세월가는 거나 봐야지.』 『참 잘났소,김씨.이게 세월이오.
이게 사는 거요? 무슨 수가 나도 나야지,이래 가지고는 못 산다 그말이오.』 『모르겠다.나는 그저,죄지은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 꼴이나 없어야지.그 마음 하나 뿐이다.』 김씨 옆에앉아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기평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시골 앉은뱅이 서울 공론하고 있는 꼴일랑 그만 들 둬.조상 잘못 둔 탓이나 할 밖에.』 장규가 몸을 돌려 기평이를 내려다보았다.
『못 들었어? 평생 살아도 임의 속은 모른다고 하잖어.헌데,이거야 임의 속은커녕 내 속을 내가 모르겠으니,우리 꼴이 어떻게 될 건지 그걸 모르겠으니.큰 일은 큰 일이 아니냐구?』 『큰일은 무슨 큰일.별도 뜨고 좋기만 하네 뭐.』 기평이의 얼굴이 편안하다.어둠 때문에 장규는 그 표정을 보지 못한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자빠졌냐?』 기평이 여전히 낮은목소리로 말했다.
『한놈이 놓은 다리는 열 놈이 건너지만,열 놈이 놓은 다리는한 놈이 못 건넌다고 했어.무슨 소린지 알어? 한놈이 정성을 들이는 걸 중구난방 제각각 대들어서 못 당한다는 거 아니겠어?나 죽었네 하며 엎드리면 된다는 김씨 말도 말 이 안 되기야 마찬가지지만,그러니 어쩌겠냐? 나라 잃은 게 벌써 수 십년이다.이때까지 그러고 살아왔다.그렇다고 무슨 수가 보이는 것도 아니잖니.』 『소경이 물에 빠졌다고 제 눈 먼 탓이나 하고 있어야 한다 그거냐? 그렇게 살다가 나라꼴 이 모양이 되었고 힘없는 백성은 오뉴월 타작마당에 보리알처럼 죽어가는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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