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달콤한 중독 … 한번 맛 보면 못 벗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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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그가 대학로에 올리고 있는 연극 '안티고네'. 한지를 이용해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전통미를 표현했다.

세계적 연극무대 디자이너 장 기 르카.

장 기 르카(65·사진)는 단순미 예찬론자다. 단순한 것일수록 그 속은 복잡하며, 다루기 어렵지만 그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 40년간 200여 개의 연극무대를 디자인하고, 피터 브룩을 비롯한 거장 연출가와 작업하며 터득한 교훈이다.

프랑스 출신이지만 유럽 전역은 물론 미국 브로드웨이 무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활동 범위는 넓고도 깊다. 그런 그가 지난주 한국에 왔다. 그리스의 유명한 고전 비극 ‘안티고네’를 대학로 학전 블루 소극장에 올리기 위해서다. ‘안티고네’는 그가 유독 애정을 보여온 작품으로, 많은 무대를 여러 국가에서 선보여 왔다. 이번에 대학로에 올린 ‘안티고네’의 무대는 그의 철학인 단순함을 살리면서도 한지를 이용, 한국 전통미를 살려 박수를 받았다.

-당신의 무대미술 철학은?

“난 새로운 공간을 접할 때 그 공간에 ‘너는 누구냐’고 말을 건다. 그러면 공간이 답해 준다. 그렇게 공간의 성격을 파악한다. 이번에 ‘안티고네’를 올린 극장은 매우 소규모다. 그래서 흰색 한지를 여러 장 수직으로 세워, 극의 내용과 맞게 감옥 같은 분위기를 냈다. 또 등장인물들이 극의 최고조 부분에서 한지를 찢게 했다. 한지라는 재료를 매우 단순하게 사용했지만 많은 효과를 낸 셈이다. 사실, 뭐든 복잡하게 하는 건 쉽다. 쉬우면서 세련되고 호소력이 있는 단순미를 연출하기가 더 어렵다. 하지만 그게 더 아름답다. 내가 강조하는 건 공간 디자인이 공간에 얽매이면 안 된다는 거다. 자유로워야 한다. 공간은 빛 한 줄기만으로도 창조될 수 있다.”

-혁신적인 연출가로 유명한 거장 피터 브룩과의 만남은?

“계속 유럽에서 활동하다 뉴욕 연극계를 봐야겠다는 생각에 미국으로 향했고, 거기에서 피터를 만나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공장 터 등 버려진 공간을 극장으로 재탄생시키자는 생각이 잘 맞았고, 뉴욕뿐 아니라 도쿄·유럽을 함께 순회했다. 그런데 워낙 거장이라 아무도 그에게 ‘노(No)’라고 말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 없더라. 언젠가 피터와 로마에서 작업할 때, 그가 갑자기 무대가 맘에 안 든다며 밤을 새워 좌석을 뒤로 밀자고 했다. 공연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나는 반대 의견을 말해 관철했다. 공연 뒤 피터가 다가와 ‘당신이 옳았어’라고 인정했고, 그 뒤 우리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다.”

-그런 인연도 25년 만에 끝내고 지금은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서로 대화가 없어졌다. 우연히 복도에서 만나 ‘최근 들어 우리가 통 얘기를 하지 않았네요’라고 했더니 피터는 ‘서로 너무 잘 아니까’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지금이 헤어질 때’라고 느꼈다. 난 지루한 건 못 참는다. 과거를 회상하는 걸 좋아하지 않고, 항상 현재와 미래에 집중하는 사람이다. 피터와 일하는 건 즐거웠지만 그와 함께 생을 마감하고 싶진 않았다(웃음). 지금은 유명 건축가 프랭크 오 게리 등과 함께 뉴욕의 극장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동시에 노르웨이에서 올리는 무대도 디자인하고 있다. 집은 프랑스에 있지만 전 세계를 떠도는 생활이다.”

-연극계에는 어떻게 입문했나.

“우연이자 필연이다. 아버지 건강이 좋지 않아 10대 초반부터 제도사로 일해야 했다. 나름대로 재미있었지만 반복되는 일에 싫증을 느꼈다.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서 모험을 했다. 연극 축제 홍보 담당이었던 친척 형에게 무작정 찾아가 배우들 뒤치다꺼리를 하는 일을 소개받았다. 배우들에게 콜라를 갖다 주거나 좌석 번호를 붙이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무대 디자인을 하는 부서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그곳 상사가 항상 지각하는 사람이어서 우연히 내가 중요한 일을 맡게 됐다(웃음).”

-당신에게 연극이란?

“연극은 달콤한 중독이다. 한번 맛을 보면 절대로 헤어날 수 없다. 난 그렇게 연극에 중독됐고, 그래서 행복하다. 물론 작업이 모두 즐겁지만은 않다. 하지만 연극으로 다양한 인생을 만나는 게 좋다. 삶이 지루할 틈이 없으니까!”  

글·사진=전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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