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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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길례는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의 눈은 왜 합환(合歡)의 순간 나타나곤 했는지,아리영아버지와의 일이 있은 다음부터는 그것이 왜 보이지 않았는지,그러다 저 크리스털알에 포개져 또 나타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떻든 환각(幻覺)이다.
상실감으로 몹시 「갈증」을 느낄 때라거나,몸이 몹시 쇠약했을때,또는 콤플렉스를 억누르지 못할 때 환각을 보게 되는 수가 있다는 글을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다.
불완전 연소.
남편과의 밤일은 그랬다.타다만 모닥불 같은 미진함이 길례의 육신을 안으로부터 그을게 했다.
「절정」이라고 생각한 것도 이제 돌이켜보니 「중턱」이었다.그나마 빠른 걸음새를 따라잡느라 허겁지겁했다.
그런 것이 부부관계이거니 했었다.그러나 육신은 절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 목마름이 환각을 보게 했는지 모른다.아리영 아버지와 맺어졌을 때부터 환각이 사라진 것은 해갈된 때문인가.
그런데 환각은 크리스털알에 포개져 또 나타났다.아리영 아버지집 현관 열쇠에 매달려 있는 저 눈부신 크리스털알에….
이것은 무엇을 갈망하는 환각인가.
전화 소리가 울렸다.
가슴이 철렁했다.
아리영 아버지 전화인지도 모르겠다.어떻게 응대해야 할지,열쇠문제에 대해서는 또 뭐라고 해야 할지 막막했다.
한참만에야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 안받으시길래 안계시나 했어요.』 포목점 여장부였다.안도와 실망이 한데 얽힌다.
『지금 막 답례 편지를 쓸 참이었어요.』 『답례는 무슨….그럴 시간이 있으시면 우리 그림이나 그려주시그래! 이젠 큰일도 다 치르셨으니 일하십시다.』 여장부는 대뜸 그림 재촉부터 한다. 『그럴만한 시간 여유가 있어야지요.』 『여자의 시간이야 자신이 만드는 것이외다.만들기 나름 아닙니까.몇시부터 몇시까진 내 일을 한다… 눈 딱 감고 이렇게 안하면 평생 시간이 없는 법이에요.』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이 두 날의 칼을 잘 휘둘러온여장부다운 실용론이다.
『옳은 말씀이지만,이 나이에 아이까지 키우자니 뜻대로 되지 않네요.』 『하긴 그러시겠어요.그럼 도움이를 두시그래.도움이 사례비 이상으로 더 버시면 되지 않습니까?』 가사 보조원을 두라는 얘기다.
길례는 지금껏 남의 일손을 빌려 본 적이 없다.내 집안을 남이 서성거리는 것이 싫었다.
『그런 결백벽이 탈이외다.쯧쯧….』 여장부는 딱하다는 듯이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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