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 화면 가득 사내들의 거친 숨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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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김해곤
주연:송승헌·권상우·지성
장르: 액션
등급:18세 이상 관람가 

‘숙명’은 철저히 남자들의 영화다. 한때의 끈끈한 우정, 어쩔 수 없는 음모와 배신, 이어지는 필연적인 복수, 그리고 예정된 파국까지. 극적인 ‘남자 이야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기승전결의 요소들이 한데 모였다.

폭력조직에 몸담고 있는 네 명의 친구가 주인공이다. 불우하다는 말이 진부할 정도로 비참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 우민(송승헌). 말수는 적지만 주먹과 칼 쓰는 솜씨는 조직 내 최고다. 불 같은 성질에 욕 없으면 문장이 완성되지 않는 철중(권상우). 그에게 돈은 곧 생존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친구의 등에 칼을 꽂는 행위쯤이야 상관없다. 우민과 형제 같은 사이인 도완(김인권)은 우민과 함께 믿었던 철중에게서 배신당한 뒤 마약에 찌들어 사는 폐인으로 전락한다. 이들을 지켜보는 영환(지성)은 산산조각난 우정에 착잡함을 감추지 못한다.

제목 ‘숙명’은 짜증날 정도로 꼬여가기만 하는 이들의 관계를 상징한다. 그것은 벗어나려 해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개미지옥 같은 관계다. 숙명이라는 단어의 비장함은 폭력 묘사를 통해 극대화된다. 그중에는 배신자의 아킬레스건을 끊거나 면도날로 여성의 뺨을 조용히 내려긋는 잔혹한 것도 있고, 50대 1의 현란한 패싸움 같은 꽤 볼 만한 것도 있다. 길거리와 항구, 카지노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대규모 액션 신은 영화의 오락적 기능을 초과 달성(?)하겠다는 제작진의 야심을 상당 부분 이뤄냈다.

송승헌과 권상우도 제각기 갖고 있는 스타성을 온몸으로 뿜어낸다. 한없이 애잔한 송승헌의 눈빛이 그렇고, 여동생 뒤를 쫓아가며 수표를 찔러 넣어주는 권상우의 디테일한 코믹연기가 그렇다.

그러나 ‘숙명’에 대한 호의적 평가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두 배우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게 해주는 작품이 아니라 한류스타로서의 기존 이미지를 또 한번 소비하는 데 그친 탓이다. 두 배우는 17일 열린 시사회에서 말했던 것처럼 “정말 열심히, 재미있게” 촬영한 듯 하지만, ‘숙명’을 ‘송승헌의 재발견’이나 ‘권상우의 재발견’으로 꼽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배우 탓이 아니라면 결국 기획 탓이다. 무엇보다 ‘조폭들의 우정과 배신’이라는 소재는 유통기한이 한참 지났다. ‘숙명’의 시종여일한 비장한 분위기는 2001년 ‘친구’와 거의 달라진 게 없다. 트레이닝복을 입지 말라는데 입었다고 때리고, 트레이닝복 대신 등산복을 입었다고 때리는 식으로 유발하는 웃음도 ‘친구’ 이후 줄을 이었던 조폭 코미디의 재탕, 삼탕이다.

연출은 ‘파이란’의 각본을 써 각광 받았고, 2006년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성공리에 연출 신고식을 치른 김해곤 감독. “인간들의 가소로움과 그 가련한 투쟁에 가슴 가득 연민과 위로를 머금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도는 ‘파이란’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불행히도 ‘파이란’ 같은 성취는 이루지 못한 듯하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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