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오답노트’ 다시 쓰려는 재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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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만 민간에 맡기는 방식은 이미 1996년 말 김영삼 정부에서 도입했던 제도다. 이 제도 도입 이후 민영화가 물 건너가고, 개혁도 늦춰져 실패작으로 기억되고 있다. 강원대 김광수 교수는 “정권 초기에 벌써 타협안이 나오기 시작하면 공기업 개혁은 노조와 이해집단·정치권의 반발과 로비에 밀려 실패한다는 게 그간의 경험”이라고 말했다.

한국·민주노총이 정부의 공기업 구조조정 중단을 요구하며 ‘공공부문 노동자 총력투쟁 결의대회’를 열던 2000년 11월 26일의 모습. [중앙포토]


◇실패한 96년 전문경영인 제도=김영삼 정부는 임기 첫해인 93년 59개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10개 공기업을 통폐합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대기업에 공기업을 넘길 수 없다는 원칙론과 대기업의 참여가 불가피하다는 현실론이 맞서면서 지지부진해졌다. 정부가 빈틈을 보이자 공기업 노조와 엽연초 농민 등 이해집단의 저항이 거세졌고, 대선(97년 12월)이 점점 다가오면서 정치적 부담도 커졌다.

결국 96년 11월 김영삼 정부는 가스공사 등 4대 대형 공기업의 민영화를 보류하고, 경영만 민간인에게 맡기는 ‘전문경영인’ 제도를 도입했다. 당시 정책 책임자였던 한승수(현 총리) 재정경제원 장관은 공기업 민영화가 바람직하지만, 그 중간 단계로 우선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 후 정권이 끝날 때까지 공기업 민영화는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이 제도 도입 후 공기업에서 ‘낙하산’ 인사와 ‘철밥통’ 같은 폐단이 없어졌다는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정권 초 아니면 실패한다=노무현 대통령은 민영화에 반대하는 발전·가스노조의 파업 와중에 취임했다. 노 대통령은 “민영화 여건이 성숙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민영화를 사실상 중단했다. 처음부터 밀렸으니 임기 5년 내내 민영화 논의는 없었다.

힘을 얻은 공기업은 점점 덩치를 키웠다. 공기업 비리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졌지만 통제하지 못했다. ‘신이 내린 직장’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공기업 직원이 결혼 상대 1순위로 꼽힌 것도 이 무렵이다. 방만한 경영은 공기업의 부실로 이어졌다. 2002~2006년 공기업의 부채는 40조원이나 불었고, 직원도 1만3000명 늘었다. 정부가 지원한 돈도 34조원에서 48조8000억원으로 44%나 증가했다.

김대중 정부는 한국통신·한국중공업 등 8개 공기업의 민영화에 성공했지만, 정권 막판에는 힘이 떨어져 한국전력·가스공사·지역난방공사의 민영화를 차기 정부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2002년 전력산업 민영화를 위한 노사정위원회의 공동 연구에 참여했던 김종석 한국경제연구원장은 “공기업의 저항이 강하기 때문에 정권 초 국민의 지지를 받을 때 개혁하지 않으면 민영화는 힘들어진다”고 말했다.

◇2008년 테마섹 모델 논란=정부가 주인인 공기업에서 민간인 사장이 개혁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숭실대 오철호 교수는 “테마섹 모델은 작은 도시국가인 싱가포르에는 맞지만 덩치가 이보다 큰 우리나라에는 적합하지 않다”며 “특히 선거 논공행상을 따지다 보면 낙하산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고, 노조와 이해집단을 통제하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공기업의 효율성을 높이는 게 목적이라면 민간과 경쟁하거나 효율이 떨어지는 공기업을 시장에서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인천대 손양훈 교수는 “모든 공기업을 매각 대상에 올려놓는다는 생각으로 민영화를 추진해야 한다”며 “외국 사례를 보면 민영화 과정에서 시장원리를 엄격히 적용하면 성공했고, 과거 방식을 부분적으로 남겨두면 실패했다”고 말했다.

손해용 기자

이명박 대통령-강만수 장관 공기업 발언

▶이명박 대통령

-“민영화할 수 있는 것은 해서 국민 부담을 줄이고, 책임경영을 해서 성과를 내는 방식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2007년 10월 31일)

-“산업은행과 같은 국책은행을 팔아 중소기업 지원 기금을 마련하겠다”(11월 12일)

-“공기업의 효율을 올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민영화” “시장이 잘하는 것은 시장에 맡기겠다” “싱가포르식 민영화 방안도 검토 중이다”(11월 16일)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공기업 민영화는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매각하느냐보다 우선 효율성을 높이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역대 정부가 공기업 민영화를 추진했으나 주인이 국내 재벌이 돼야 하느냐, 외국 투자자가 돼야 하느냐 등을 놓고 논란이 계속됐다. 지분은 정부가 소유하되 경영만 민간에 맡기는 싱가포르 테마섹 방식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공모를 통해 민간에서 최고경영자를 선임해 효율성을 높이자는 취지다.” (2008년 3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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