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氏 "푸른 사과가 없는 국도"출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6면

90년대 들어 표면화된 신세대의 감수성을 형상화하는 데 몰두해 온 신예작가 배수아(30)씨의 첫 창작집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고려원)가 나왔다.
93년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배씨는 가족주의의 해체,탈이데올로기적 성향,합리적 개인주의로 요약되는 90년대의 시대상을 젊은이들의 풍속도를 통해 그려 내고 있는 작가다.
이번에 수록된 7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마음에 공통의밑그림을 간직하고 있다.그 그림을 들여다보지 않고는 배씨가 그려 내는 90년대 젊음의 전체상을 포착하기 어렵다.
여기 하나의 풍경이 있다.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모로 인해 토라진 아이가 다락방에 올라간다.어두운 방에서 아이는 엄마를 기다리다 잠이 든다.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잠에서 깨어난 아이는 그방이 마치 자신의 방인 것처럼 느껴진다.아이는 두번다시 밑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다락방의 아이가 흑백사진 속에 갇힌다.
장면이 바뀌어 한떼의 젊은이들이 나타난다.그들은 10대에서 30대로 캘빈 클라인 청바지를 입고 다이어트 코크나 밀러맥주를 마시며 핑크 플로이드와 레드 제플린을 들으면서 애 인과 잠자리를 함께 하기도 한다.그들은 간섭받기도,간섭하기도 싫어 고립을선택한다.그러나 사람이 그리워 애인을 만들고 끼리끼리 모이기도한다.그러나 다시 이별하고 흩어진다.만남과 헤어짐,모임과 흩어짐은 이들의 일상이다.그들의 마음속 에는 다락방의 그 아이가 산다.너무나 고립에 익숙해져 엄마의 손길을 기다리는 상태에 중독된 아이.
배씨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이 부모가 사랑하지 않거나 이혼하거나 죽은 가정의 아이들이다.사랑의 손길을 기다리며성장한 그들은 영화『양철북』에 나오는 오스카처럼 성장을 거부한다.미치게 자신을 사랑하는 누군가가 손을 뻗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 아이의 손을 잡아줄 수 없다.그들 사이에는 무수한 문화상품의 이미지로 구축된거대한 장막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다락방의 아이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엄마가 아니라 마돈나다.애정결핍의 아이는 이내 엄마의 가면을 쓴 마돈나의 중독자가 된다.그리하여 그들 사이의 소통은 영영 물거품이 되고 만다.이미지의 포로가 된 그들은 어른처럼 술마시고 경마하고 정사를 나누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체중이 안실려 있다.액션은 없이 포즈밖 에 취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존재방식이다.
배씨는 호텔을 나오는 20대의 연인들을 『섹스하고 싶어 미칠것 같은 고등학교 2학년의 남자아이와 애정결핍으로 영원한 불치병에 걸린 여섯 살 난 여자아이가 손을 잡고 호텔방을 나선다』고 묘사한다.이미지의 거품을 걷어 낸 90년대의 풍경은 이런 것인가. 배씨가 그려 낸 풍경화는 비관적이다.아름다운 필치로 그려 내지만 그 바탕색은 암울한 블루의 색조가 진하게 깔려 있다.배씨의 작품에서 블루는 이미지에 차단된 얼굴들이 뿜어내는 죽음의 안색이다.
南再一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