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으며생각하며>28.美한국연구協회장 재미교포 鄭慶朝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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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정경조(鄭慶朝)박사.이다지도 당당한 틀을 가진 신사를 누가 올해 75세 난 노인으로 볼 것인가.6척이 넘는 장신에다 굵은뼈대와 탄탄한 근육이 한창 젊은 운동선수의 그것처럼 잘 뭉뚱그려진 남성미(男性美)이미지가 되어 몸 밖으로 쉴 새없이 발산돼나온다.아무래도 조금은 놀랄 수밖에 없다.처음 만난 이들이 놀라워 하는데는 익숙해 있는 듯 그가 말한다.『제가 운동을 좀 많이 해요.그리고 손기정(孫基禎)씨 하고 친구거든요.』그러면서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는 탱글탱글한 장딴지를 자랑스럽게 보여준다.그가 머리에 야릇하게 보이는 검은 가발을 쓰고 있다는 점도 재미있다.만일 이런 가발을 게을러 안쓰고 다녔다면 「청년 노인」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는 이 통일된 컴포지션이 허물어졌을뻔했다. 그는 현재 미국 시민이다.태어난 곳은 평양이지만 어렸을 때 서울로 이사와 서울수송국민학교.양정고보를 거쳐 48년에서울대학교 문리대 정치학과 1회 졸업생이 된다.
그는 이번에 서울.베이징(北京)을 거쳐 평양에서 열리는 「평축(平祝)」을 구경 가려고 한국엘 왔다.나는 그의 이런 계획을알고 서울에 들르면 『좀 만나 뵐 수 없겠는가』고 연락을 해 놓았던 참이다.「조선출판교류협회」가 자기에게 보 내온 초청장을내게 보여주며 그가 말한다.
『제가 글과 책을 많이 쓰고 하니까 북한 홍보에 이용하려고 이 초청장을 보낸거라고 봐야겠지요.자기네가『이조실록』『고려대장경』을 번역했으니 미국에서 팔아 달라고 편지를 보내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서울 와서 친구들과도 상의했지만 이번에는 평양에가지 않기로 했습니다.우리같은 재미교포 데려다가 자기들 맘대로무슨 단체 만들어 거기 이름 넣어 놓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했다고 성명서도 발표하고… 이번에 가면 그렇게 될 것이 뻔해서….
』 재미친북(在美親北)단체의 활동에 대해 그는 이렇게 본다.
『전에 냉전체제아래 있었을 때는 미국에 있는 친북 교포들이 조용하게 지냈지요.요새 북한과 미국이 나라 간으로 교류를 시작한다니까 싹을 내기 시작했습니다.그러나 주로 비즈니스를 해보자는 것이 목적입니다.사상이 실린 사람은 거의 없고요 .별 문제있는 것이 못됩니다.일본의 조총련처럼 힘을 갖출 수도 없고.』그러나 그가 이렇게 개인적 차원의 판단과 처신에서는 북한 세력에 대해 냉정하지만 남북한의 분단 현실에 대해서는 평화와 통일에 대한 부글부글 끓는 염원으로 그의 크고 건강한 온몸이 가득차 있다.그가 미국 시민으로 귀화하지 않고 한국 사람으로 남아있었더라면 내 토박이 눈에 잠시나마 이렇게 이중적인 잣대가 있을 수 있을까하고 비쳤을 정도로 생각의 폭이 넓기는 어려웠으리라.그는 말한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생각해야죠.한국은 북한 경제가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더러운 놈 보고도 영어로는「Nice to see you」해야죠.김일성(金日成)이 사망했을때제 생각엔 조문을 보냈더라면 합니다.이런 때는 같은 나라안이 아닌 외교적 조의(弔意)죠.
나는 무엇보다도 남북한이 군대를 줄여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각각 5만명 정도면 두 쪽이 다 충분하지 않을까요.지금 남한은 특히 인적 자원이 절대 숫자에서 모자랍니다.남북한이 합해 2백50만명의 젊은이를 군대에 붙잡아 두고 생산 현장에 투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나라 전체의 크나큰 손실입니다.나는 뉴욕타임스紙에 69년「통일된 한국」,70년「평화적 한국 통일」,72년에「한국 통일」등 칼럼을 써서 그 당시로서는 감히 말하기어렵던「남북대화를 통한 평화공존속에 서 통일로 가야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鄭박사는 현재 한국연구협회(Korea Research Council)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이 협회는 해방전인 30년대에 안창호(安昌浩) 선생과 장세운 박사가 독립운동기구의 하나로 설립했다고 한다.미국 정부는 한국 문제에 관한의 견,또는 한국인들의 의견을 이 협회에 조회해올 때가 있다며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일제가 한국을 식민통치하던 35년간 가장 노력한 것 가운데하나는 한국의 존재가 세계에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이에 대항해 안창호선생은 장세운 박사의 도움을 얻어 한국 알리기 운동을 펴기 시작했습니다.「아는 것이 힘이다 」는 구호도붙이고 한국을 알리는 팸플릿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습니다.
장박사는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수학박사 학위를 딴 수학자였습니다마는 애국심 때문에 교수직까지 그만두고이 일을 했지요.제가 미국에 오고 난 뒤에도 미국 사람들 가운데 한국이라는 나라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 다.연로한 장박사를 좀 도와드리곤 한 것이 인연이 돼 이 일을 맡아 하게 됐어요. 최근에는 미국 백악관 비서실장 리언 패니터가 핵 전쟁에 관해 우리 협회의 의견을 조회해 왔습니다.저는 핵 전쟁은 결코 있어서는 안된다고 회신했습니다.우리끼리 얘깁니다마는 미국에는 전쟁을 원하는 그룹이 있습니다.군산복합체(軍産複合體 )라는 것이 그들 가운데 하나지요.저는 패니터에게 「당신이 한국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면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될 것이오」하고고무했습니다.』 그는 양정고보 시절 손기정 선수와 한반이었다.
나이는 손선수가 두살 위였지만 신의주 고보에서 양정으로 전학 오는 바람에 학교가 좀 늦어졌던 것이라고 한다.손선수와는 내내같이 운동을 했었단다.
***손기정선수와 級友 이 시절 양정학교에는 유명한 독립운동가며 無교회주의 기독교 사상가였던 김교신(金敎臣)이 교사로 있었다.鄭박사가 「붓이 칼보다 강하다」는 신념을 확고하게 가지게된 것은 김교신 선생의 가르침 덕분이었다.그의 말을 듣는다.
『김교신 선생은 제가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입니다.그분을 생각하면서 나는「내가 미국에서 글을 쓰면 한국에 이바지한다」고 되뇌입니다.한 장만 쓰면 몇 만장 나오는 것이 글이거든요.나는 뉴욕에 있는 맥밀리언출판사를 통해 50년대 부터 지금까지 대략 10년에 한권씩 네권의 책을 냈습니다.「내일의 한국」「新한국」「제3공화국」「한국가이드」가 그것입니다.』 그에게 미국서 살게 된 내력을 물었다.
『제가 서울대 다닐 때 공부를 잘 했어요.美군정 때라 서울대총장으로 안스테드 박사라는 미국인이 와 있었습니다.그분이 영어시험을 치라기에 쳤더니 성적이 좋다면서,「자네는 우리 미국 정부가 초청해 미국에 유학시키기로 했다」는 것이었 어요.학교를 선택하라기에 뉴욕에 있다는 점에 마음이 끌려서 컬럼비아대학을 택했습니다.그때 우리나라에는 여권을 발급하는 제도조차 없던 땝니다. 인천에서 美육군 수송선 제너럴 그릴리호를 타고 17일 걸려 미국에 닿았어요.7월이라 배 안이 찌는듯 더웠습니다마는 마음이 희망에 부풀어 있었기 때문에 고생스럽다는 생각은 없었고요.그때도 꿈은 공부를 해 우리나라 통일에 이바지하는 것이었습니다.美蘇 양국을 좀 깨우치게 해 우리나라가 통일하는데 힘이 돼보자는게 그때의 제 꿈이었지요.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제가 아까 말한 뉴욕타임스에 쓴 글도 모두 한국 통일 관계였어요.』그가 미국으로 간 것은 49년이었다.그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났다.박사학위 과정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던 그에게 미국정부가 한국으로 출전하는 미군 장병을 위해 한국어와 한국문화를한햇동안만 강의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그는 이렇게 해 캘리포니아州 카멜시(최근까지 명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인기 만점 시장으로 있었다.그 바람에 특히 일본인관광객이 몰려 들어 지금도 붐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에 있는미국 국방외국어대학의 교수가 됐다.
미군의 한국 주둔이 쉽사리 끝나지 않는 바람에 한해 두해 더있었던 것이 이젠 43년째 이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있다.
그의 말을 듣는다.
『이 대학은 28개 나라 말로 외국파견 군인과 외교관을 가르칩니다.학생수는 약 3천명,모든 학생들은 1년동안 하루 여덟시간씩 배우게 돼 있습니다.이 사람들은 전역하거나 공직에서 물러나면 자기가 머무르던 나라와 사업을 시작하는 경우 가 많습니다.미국 정부는 여기까지 내다보고 이들에게 외국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지요.나는 이 대학에서 한국을 가르치는 동안 북한을 포함하는 한국문제 전문가가 돼 버렸습니다.이 대학 도서실은남북한에 관한 자료를 매우 광범하고 신속하게 공급받고 있습니다.북한 자료는 주일(駐日).주중(駐中)대사관이 대줍니다.』 ***英語 철저히 배워야 꼭 하실 말씀 한마디를 청했다.
『한국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지금 세계 공통어인 영어를 미국.
영국사람처럼 할 수 있게 되고 볼 일입니다.국민학교때부터 영어교육을 철저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려야 합니다.또 그래야만 앞으로 경제도 밖으로 뻗어나갈 수 있습니다.
경제는 이제 문화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우리나라 해외 교포수가지금 5백만명입니다.미국에 2백만명이 있습니다.이 사람들은 거의 지식에서는 전문가고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사람입니다.이중국적을 허가해야 합니다.왜 자기 나라의 가장 중요한 자산을 억지로해외에 다 버려야 합니까.세계에서 큰 나라치고 이중국적을 허가하지 않는 나라가 몇나라나 있습니까.저도 이번에 한국서 좀 더머무르고 싶지만 관광비자 체류만료가 열흘이라,잘못하면 수백달러의 벌금을 물게 되지 요.』 나는 그의 이 말을 듣고 며칠동안생각해본 다음 나 자신도 이중국적 허용을 찬성하는 쪽으로 변신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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