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럼>韓銀측의 소비자 모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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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개혁」을「세계화」로 바꾸었다.세계화라는 말은 머리 위를 날아 가고 있는 비행기를 연상시키고 머나먼곳에 대한 노스탤지아를 느끼게 한다.그러나 이 비행기는 착륙해야 한다.그래야 구체적 탑승이 가능하게 된다.세 계화를 땅에 내려 앉혀 놓으면 그것은 정치를 갈 데까지 민주화하는 것과 경제를 갈 데까지 자유 시장경제화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다시 말해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야말로 세계화의구체적 모습인 것이다.
기독교에는 십계명이 있다.그 첫 계명은「내 앞에 다른 神을 두지 말라」다.만일 다른 신을 두게 되면 기독교도는 그것을 신성모독의 제일로 칠 것이다.민주주의는「국민 앞에 다른 왕을 두지 말라」를 첫 계명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자유시장 경제는 소비자를 왕으로 삼는 체제다.소비자를 모독하고서는 자유시장경제는 그 윤리적 기반이 무너지고 만다.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소비자는 저축자의 다른 이름이다.우리나라의 소비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저축률을 자랑하는 왕이다.
불가불 이쯤에서 우리는 막스 베버가 말한 프로테스탄트 윤리를생각하게 된다.여기서 프로테스탄트란 번것을 다 쓰는 대신 근검절약하여 저축하는 사람으로 나타난다.가톨릭 저술가인 마이클 노박은 최근 그의 인상 깊은 명저『가톨릭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이것을 가톨릭 윤리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한국과 일본의 경우를 두고 많은 논자들은 유교 윤리를 원용해 붙인다.
기업가가 자유시장경제에서 지혜로운 지도자 노릇을 할 수 있는자격을 가진 것은「소비자는 왕이다」를 체득하면서 컸으며,일해 가는 대표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기업에서 일하고 있더라도 관료이지 기업가나 경영자가 아니다.
최근 한국은행 김명호(金明浩)총재가 경기 과열을 경계하는 담론을 폈다.나는 당금(當今)의 경기를 과열 쪽으로 보는데는 그의 견해에 찬성한다.물가 오름세가 급해지고 무역적자가 가속되고무엇보다 일손이 달리고… 이렇다는 것은 경제 체 온이 정상을 넘었다는 것이다.「잘 가노라,너무 달리다가는 곧 중지할 수밖에없는 상황」을 걱정하고,따라서 경기 진정 대책을 호소하는 것은중앙은행 총재의 본연의 임무다.그러나 나는 그가 걱정하는 경기의 과열보다는 그가 이 담론에서 우리나라 소비자에 대해 노골적「왕권」모독을 서슴지 않았다는게 더 예삿일이 아니라고 본다.
그는 물가상승.국제수지 적자의 원인이 과소비에 있다고 진단했다.앞에서도 말했지만 뭐라고 해도 우리나라 소비자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저축률을 보이고 있는 사람들이다.한국은행이 찍어 내고 있는 돈은 궁극적으로 한은(韓銀)이 소비자에게 발행하는 채무증서다.우리나라 소비자의 윤리적인,너무나 윤리적인 왕으로서의높은 저축률이 아니었더라면 한은이 발행하는 그 숱한 통화는 발행되는 즉시 휴지가 되었을 것이다.이런 우리나라 소비자에게 과소비를 하지 말자는 말을 할 수 있 는 자격은 채권자인 소비자들 자신에게만 있다.
金총재의 담론은 과소비를 줄이기 위해 세수를 확대해야 된다고하는「외람」으로까지 전진한다.언제 우리나라 정부가 소비자보다 더 높은 저축률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이 점에서 그는 중앙은행총재로서의 전문적 지식을 포기하고 있다.경기를 진작하려면 세금을 줄이는 것이 맞는 정책이라고 해서,경기를 진정시키려면 세금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너무도 단순한 대칭(對稱)논리는 전혀 미덥지 못하다.세금을 더 거두는 것은 나라살림에 꼭 필요할때만,그것도 울며 겨자먹기로 승 복할 일이다.경기를 진정시키겠다는 목적으로 이미 일본을 능가해 20%를 넘는 담세율에도 불구하고,그것도 소비자의 근로소득세와 소비세가 주를 이루는 세제아래서 세금을 더 거둔다? 괴이쩍고 괴이쩍다.
金총재의 담론은 마침내 가계대출 억제를 구체적으로 강화하겠다는 왕에 대한 확실한「방자(放恣)」수준의 모독을 서슴지 않는데까지 이르고 만다.우리나라 은행은 소비자가 저축한 돈에 막대한수수료를 붙여 이자놀이를 하거나 그 돈으로 증권 투자를 해 벌어 먹고 산다.그런 소비자가 때로 필요에 따라 은행돈을 좀 대출해 나가는 것을 우격다짐으로 지금보다 더 죄겠다는 것이다.한은이 자유시장 경제의 왕인 소비자를 모독하면 그에 대한 소비자의 처벌은 예금 감소와 인플레이션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왜 모를까.관료주의의 두꺼운 안맹(眼盲)에서 아직 눈을 못 떠서 그럴 것이다.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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