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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정체성 세우기 방해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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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지난해 말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한.중.일 3국의 갈등구조는 세계화의 영향 속에서 지구촌에 완전한 평화무드가 정착되리라는 장밋빛 전망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경제적으로 역대 어느 시대보다 활발한 교역을 통해 3국의 우호를 다지고 있는 시점과 맞물려 새로운 민족주의의 부활을 예고하는 신호탄이 여기저기서 발견되고 있다. 최근 일본이 독도 문제에 대해 보여준 태도나 일본 총리의 거침없는 발언은 일본 내에 신우경주의가 득세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중국 역시 최근 진행되고 있는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통해 새로운 패권주의를 향해 한발 내딛기 위한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갈등의 요소와 더불어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평화와 상생의 담론을 구축하고자 하는 열망과 인식이 3국의 시민단체나 학계를 중심으로 서서히 증가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친일반민족 행위진상규명법안은 이러한 정황 인식 속에서 통과됐다. 따라서 국민이나 언론은 이 법안의 통과가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 인식하거나 그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이해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래서 이 법안의 통과를 논하면서 마치 고구려사 논쟁에서처럼 과거지향적인 태도나 3국의 갈등구조를 촉발하는 것보다는 미래지향적으로 공존과 화해의 지향점을 향해 가야 한다거나, 최근 일본 총리의 발언으로 인해 흥분돼 있는 우리 국민의 정서를 거스를 수 없는 것이 대세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이런 정서와 더불어 어떤 국회의원은 갑자기 이 법안이 통과되면 북한의 흐름에 휩쓸릴 수 있고 북한에 이용될 수도 있다는 남북 갈등의 논리로 해석하기도 했고, 또 다른 의원은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국민화합보다는 민족분열이나 국론분열을 심각하게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이러한 논의들은 대부분 사태를 자아와 타자 또는 자국과 타국이라는 관계성에 기초해 바라본 관점들이다. 친일진상규명법안의 통과를 놓고 자국민의 '갈등'과 '분열'을 우려하거나 타국과의 관계선에서 그 의의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친일진상규명법안'은 이러한 관계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반세기 전에 일어난 우리 역사의 문제이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관련된 사실규명의 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분열을 구실로 사실을 호도하거나 정치적 정황에 의해 역사가 왜곡돼야 할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다.

강진석 한국외대 외국학연구센터 교수.중국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