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조직 개편안 타결 득과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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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양보 … 솔로몬 지혜”

명분 얻은 손학규

국정 발목잡기 여론 부담 털고
‘강한 야당의 리더’ 입지도 굳혀

손학규 대표가 20일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조직 개편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진=강정현 기자]

“솔로몬의 지혜처럼 사랑하는 자식을 내주는 마음이다.”

통합민주당 손학규 대표가 20일 기자회견을 통해 정부조직 개편안 협상에서 양보하겠다고 선언하며 던진 말이다. 손 대표는 “마지막까지 요구한 해양수산부 존치는 해양 강국의 비전을 실현하려는 의지의 표현이고 지금도 소신엔 변함이 없다”면서도 “국민을 위해선 상대방의 잘못만을 따지고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손 대표가 이런 결심을 한 건 조각(組閣)이 끝내 파행으로 갈 경우 야당에 쏟아질 ‘국정 발목잡기’ 비판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손 대표는 기자회견 전날인 19일 오후 박상천 공동대표, 김효석 원내대표와 회동한 데 이어 밤늦게 신계륜 사무총장, 우상호 대변인 등과 만나 의견을 구했다. 그런 뒤 스스로 양보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그는 지난 주말 ‘해양부 폐지-여성부 존속’이란 타협 안을 수용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18일 조각 명단 발표를 강행, 손 대표의 자존심을 건드려 협상이 꼬였다는 후문이다.

손 대표는 이날 회견에서도 “여야가 협상 중인데 내각 명단 발표를 강행한 이 당선인의 자세는 오만과 독선 그 자체였다. 민주주의를 할 생각이 없다는 자세였다”며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당내에선 손 대표가 ‘회군’을 결정한 타이밍이 적절했다는 긍정론이 많다.

한 당직자는 이날 중앙일보 여론조사 결과 조각 발표가 성급했다는 반응이 더 많았던 점을 거론하며 “지금 양보했기 때문에 손 대표가 이 당선인보다 명분상 우위를 점한 채 협상을 끝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손 대표가 시간을 더 끌었으면 ‘야당이 너무 한다’는 비판 여론이 득세해 어려운 처지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고 했다. 이명박 특검이 21일 이 당선인의 무혐의 결론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져 이를 의식했다는 관측도 있다.

실리 면에서도 통일부·여성부 유지를 얻어냈고 국가인권위를 독립기구로 유지해 성과를 거뒀다는 평이다. 무엇보다 손 대표가 얻은 최대 수확은 이번 협상 과정을 통해 ‘이명박 대 손학규’라는 대결 구도 속에 야당 리더의 입지를 다졌다는 점이다. 당이 대선에서 패한 뒤 손 대표가 구원투수로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당 조직을 이끌어 본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일부에선 리더십에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그런 목소리가 쏙 들어갔다.

한 측근은 “구 민주당과의 합당을 원만히 마무리한 데 이어 원내 최대 현안인 정부조직법 협상도 별 탈 없이 끝냈기 때문에 손 대표는 앞으로 인재 영입 등 총선 준비에 올인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김정하 기자 , 사진=강정현 기자



“불도저식 … 얻은 게 뭔가”

반성하는 당선인 측

“아쉬움 있지만 파행 막아 다행
협상 미숙 … 결단 모양새 빼앗겨”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측은 20일 정부조직법 협상 타결에 대해 “늦었지만 다행”이란 반응을 보였다.

주호영 당선인 대변인은 “원안대로 합의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새 정부는 일하는 정부, 효율적 조직으로 국가경쟁력을 향상시키고 국민을 섬기는 데 최선을 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통일부와 여성부 존치, 해양수산부 폐지’라는 협상 결과는 이 당선인 측이 예견해온 모범 답안에 가깝다.

극도의 파행 속에 출범할 뻔했던 새 정부의 틀이 제 궤도를 찾았고, 우려했던 국정 공백을 최소화할 수 있게 된 점은 분명한 성과다. 하지만 13개로 줄이겠다던 정부 부처의 수가 15개로 다시 늘어나는 등 이 당선인이 강조해온 ‘작고 효율적인 정부’의 취지가 퇴색된 것도 사실이다.

상대가 있는 국회 협상의 특성상 ‘일방적인 승리’를 기대한 건 아니기에 이 당선인 측은 ‘만족스럽지도, 불만족스럽지도 않다’는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뻔한 모범 답안에 도달하기까지 보여준 미숙함 때문에 내부적으론 반성의 목소리가 높다.

이 당선인 측 핵심 관계자는 “너무나 미숙하고 답답한 과정을 거쳤다”며 “얻은 게 별로 없다. 면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지난 18일 통합민주당과의 협상을 앞둔 상황에서 오후 8시에 강행한 장관 후보자 발표는 20일자 본지 여론조사에서 사실상 낙제점을 받았다. ‘성급했다’는 부정적 견해(53.7%)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의견(41.0%)을 크게 앞질렀다.

“국정의 혼란과 공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 당선인의 명분보다 ‘불도저식 밀어붙이기’라는 예비 야당의 주장이 국민에게 더 호소력이 컸다는 해석을 낳았다. 지난 주말 이 당선인이 주재한 국정 운영 워크숍에 장관 후보자들을 참석시키려 했다가 2시간여 만에 철회한 것도 새 정부의 정무 기능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켰다.

어차피 여성가족부를 존치시키려면 손학규 민주당 대표의 기자회견 전에 이 당선인이 먼저 적극적으로 손을 내미는 게 나았다는 아쉬움도 나왔다. 당선인의 한 측근은 “정치적 기술의 부족으로 결단과 양보의 모양새를 고스란히 손 대표에게 내주는 결과를 낳았다”고 토로했다.

본지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 당선인의 직무 수행에 대한 평가에서 ‘잘하고 있다’는 긍정적 응답은 56.8%였다.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지지 세력들이 서서히 재결집하고 ‘새 정부 견제론’이 세력을 키워가는 상황임을 감안해도, 취임 직전의 이 당선인으로선 불만스러울 수 있는 수치다. 출범을 나흘 앞둔 새 정부에 풀어야 할 숙제가 많아지고 있다는 얘기다.

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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