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88. 온전함에 대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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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나는 거창한 인생 계획이 없다. 북아현동 집에서 아들 내외, 손녀와 함께 밥을 나눠 먹을 수 있으면 족하다. [사진작가 국수용]

 얼마 전 거리에서 파는 꽃이 색색으로 곱게 보여 발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보았다. “싸게 드릴 테니 사세요.” 꽃가게 주인은 반색하며 나를 맞았다. “이건 얼마요?” 내가 가리키는 꽃을 보며 주인이 말했다. “그거 활짝 다 피었으니 반값에 드릴게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활짝 피었다는 이유로 값이 반으로 줄어버린 꽃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꽃도 완전히 피기 전에 값이 더 나가는 것이다. 옛날 의기(義器)에 대한 고사가 생각났다. 옛날 중국 주나라 때 의기라는 그릇이 있었는데 왕이 온전해짐을 경계하기 위하여 만들었다는 그릇이다. 그 그릇은 비었을 때는 약간 기울고 물이 8부 정도 차면 반듯이 놓인다. 물이 가득 차면 뒤집어졌다고 한다. 그릇이 뒤집히면 빈 그릇으로도 쓸 수가 없다. 가득함을 경계하는 기준으로 의기만한 것이 없을 성싶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는 욕망이 있다. 어느 정도 부족한 것에 만족해야하는데, 보통 사람은 그러지 못한다. 그래서 집착이 생기고, 그로 말미암아 화를 불러오는 것이 인생에서 다반사다. 조금 부족한 것이 남아 있거나 모자라더라도 넘치고 족한 것처럼 만족하고 살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온전한 것이 아닐까?

“바람이 성긴 대숲에 불어오매 바람이 지나고 나면 대는 그 소리를 남기지 않는다. 기러기가 차가운 연못을 지나매 기러기가 가고 나면 연못은 그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따라서 군자는 일이 생겨야 비로소 마음에 나타나고 일이 지나고 나면 마음도 따라서 비느니라.” 내가 좋아하는 『채근담(菜根譚)』에 나오는 명문이다.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마음을 비우고 청산과 녹수처럼 절로 절로 살아갈 나이가 되었다. 흔히 “앞으로의 계획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러나 나는 아무 거창한 계획도 없다.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가야금을 매일 하면서 열심히 배우고 친구들과 즐겁게 얘기를 나눌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겠다.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대대로 가꾸어온 가야금을 내가 타기 시작한 지 57년이 되었다. 나에게 가야금은 우리 민족으로부터 받은 은혜이다. 1500년간 전해 온 그 가야금 소리를 좀 더 바르고 새롭게 내기 위하여 정진하는 것이 내가 그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연재를 시작한 지 벌써 석 달이 넘었다. 이쯤에서 붓을 놓는다. 그동안 읽어주신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끝>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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