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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체제도 ‘시장원리’ 따르게 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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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지난해 12월 발리 기후회의가 난항 끝에 새로운 온실가스 감축 체제를 2009년까지 합의키로 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온실가스 감축 방안에 대해서는 감축 목표 부과, 직접규제 방식 위주로 논의가 진행되어 과도한 감축 비용이 경제에 상당한 부담을 줄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산화탄소 1t의 감축 비용이 선진국의 경우 약 200달러인 반면, 개도국의 경우 20달러 미만인 상황에서 선진국으로 하여금 10배나 비싼 비용을 들여 자국 내에서 감축 목표치를 달성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비경제적이다. 또한 민간 기업이 온실가스 감축의 주체인 상황에서 선진국 정부로 하여금 재원과 기술 이전을 주도하라고 하는 개도국의 주장도 현실성이 없다.

세계 경제가 시장원리를 기반으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기후체제만이 정부주도, 직접규제의 틀에 의존하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향후의 기후체제는 개도국이 저렴한 비용으로 감축한 실적을 선진국에 판매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탄소배출권 거래 대상 사업의 범위를 대폭 확대해 온실가스 감축 투자가 상업성을 갖도록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래야 시장원리에 따라 개도국 온실가스 감축이 새로운 재원과 기술의 투자 기회가 되고, 기후와 경제의 상생 선순환 구조가 성립될 수 있다.

현행 교토의정서에는 이미 개도국의 감축 실적을 선진국에 판매할 수 있는 탄소배출권거래제도인 ‘청정개발체제(CDM)’가 설립돼 있다. 그러나 감축 목표치의 대부분을 자국 내에서 감축해야 한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인해 배출권을 판매할 수 있는 사업의 범위를 ‘상업성이 없는 순수 기후변화 방지 사업’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이 때문에 현재 거래되고 있는 연간 거래규모는 선진국 의무 준수에 필요한 감축량의 3% 수준에 불과하다.

온실가스 감축은 감축 장소가 선진국이냐 개도국이냐, 또는 상업성이 있느냐 없느냐 여부에 관계없이 기후에 대한 영향이 동일하다. 따라서 새로운 기후체제는 감축사업 범위의 정치적 제한을 철폐해 선진·개도국 간 탄소배출권 거래제도가 시장원리에 따라 기능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자국 내에서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감축 목표치를 달성할 수 있게 된 선진국들이 높은 감축 목표치를 용이하게 수락할 수 있게 된다. 아울러 이산화탄소 1t당 약 20달러에 거래되고 있는 탄소배출권 판매 수익이 인센티브로 작용해 개도국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중국 등 개도국들이 온실가스 배출을 대폭 줄이면서 동시에 성장하는 녹색 성장까지 가능하게 된다.

이뿐 아니라 개도국 감축 실적의 일부만을 판매토록 하는 경우 감축목표치를 강제하지 않고도 개도국으로부터도 지구 차원의 온실가스 감축이 가능하다. 개도국이 200만t의 온실가스를 감축해 이를 전량 판매하면, 구입한 선진국이 200만t의 온실가스 배출을 늘리는 만큼 지구 차원에서 보면 온실가스 배출 총량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나 개도국이 감축 실적 200만t 중 100만t을 판매하고 나머지 100만t의 감축 실적을 폐기시켜 판매를 못하도록 하면, 선진국은 100만t만 배출을 늘리는 만큼 폐기된 100만t은 지구 차원의 온실가스 감축이 된다. 이러한 부분판매 제도는 탄소배출권 판매 가격의 하락을 막아 개도국에도 유리하다.

이러한 시장 기반 기후체제는 선진·개도국 모두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기후와 경제가 상호 윈-윈할 수 있는 방안인 만큼 선진국 진입을 앞두고 국제적 압력을 받고 있는 우리가 적극 제안해 선진·개도국 양측의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기후협상을 주도해야 한다. 우리 경제의 사활이 달린 기후 문제를 남들이 짜려는 틀에 맡기고 기다릴 수는 없다.

정래권 유엔 아태경제사회위원회 지속발전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