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단상>WTO의 파워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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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상품이 국경을 넘지 못하면 군대가 국경을 넘게 된다.』세계무역기구(WTO)의 초대 사무총장이 확실시되는 이탈리아의 르네토 루지에로가 후보로 나서면서 출사표(出師表)로 인용한 말이다.보다 많은 자유무역,그것을 뒷받침하는 효율적인 다자 간(多者間)체제가 WTO의 궁극목적이다.
그러나 출발부터 WTO보다는 사무총장에 누굴 앉히느냐는「Who」로 스타일을 구겼다.살리나스후보가 사퇴하고 미국이 루지에로후보에 대한 반대를 철회함으로써 힘겨루기는 일단락됐다.루지에로총장의 임기는 1기 4년으로 한정하고 다음 총장 은 비유럽인을기용한다는 「조건」이다.경제협력개발기구(OECD)사무총장은 61년 발족이후 유럽인이 맡아왔다.내년 6월 총장직은 캐나다인에게 넘어간다.현 프랑스인 총장은 그를 조건으로 시한부 중임됐다.「차가운 평화」가 실감난다.
사무총장선출을 둘러싸고 3개 지역파워가 서로 다른 비전으로 맞닥뜨렸다.시장경제원리의 확산과 규제철폐가 새 세계경제질서를 위한 미국의 비전이다.농민의 보호와 개별 국가의 특수성을 감안하는 세계무역체제가 유럽쪽 비전이다.정부주도와 산 업정책등 아시아적 발전모델을 포용하는 체제가 개발도상국들의 비전이다.글로벌 리더십의 부재(不在)속에 이 세 비전간의 갈등과 알력은 거의 숙명적이다.루지에로는 「정직한 브로커」임을 자처한다.개별 국가에 대한 보복게임을 싫어하고 「다자 간 룰」에 따른 해결을주창한다.
무역의 「현실」이 묘하다.아프리카 50개국의 수출총액은 벨기에의 수출액보다 적다.중남미 31개국의 수출총액은 이탈리아 한나라에도 못미친다.1백25개국간의 유엔총회식 숫자게임은 형식이고,무역대국들간의 파워게임이란 본질은 변함이 없다 .일본이 김철수(金喆壽)후보를 지지하다 루지에로 지지로 돌아선 사정이 많은 것을 암시한다.
20여개국의 지지를 모은 한국의 후보가 차장의 한사람으로 루지에로 밑에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리 「후일을 기약」한다 해도 모양새로는 우습다.WTO의 앞날은 대표성.대응성.신뢰성 확보에좌우된다고 한다.총장선출을 둘러싼 게임의 이름은 신뢰보다는 경계와 견제다.「정직한 브로커」의 앞날이 걱정스럽다.
〈本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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