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를 향한 그의 ‘토스’는 계속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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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 22면

신동연 기자

현대캐피탈 남자배구단의 김호철(53) 감독은 말이 빠르다. 그의 말을 모두 받아 적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디지털 녹음기를 꺼내며 양해를 구했다. “그럼요!” 김 감독은 녹음기가 자신의 목소리를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외국인 선수도 없이 세 번째 시즌 타이틀에 도전하는 이 ‘오기의 사나이’는 의외로 여유가 넘쳤다.

리그 3연속 우승 도전, 김호철 현대캐피탈 감독

1970~80년대 한국 남자배구의 영웅, 세계 남자배구의 중심 이탈리아를 사로잡은 사나이 김호철.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 현대캐피탈 사령탑에 오른 지 만 4년이 지났다. 머리칼은 새카맸지만 수염은 희었다. 그의 얼굴 위로 세월이 스쳐 지나가는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눈빛은 허공에 떠오른 공을 두 동강 낼 듯 변함없이 형형했다.

김 감독은 2003년 이탈리아에서 돌아왔다. 이탈리아에서 선수와 지도자로서 성공적인 시간을 보냈고, 이탈리아 청소년대표팀을 맡아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김 감독은 현대 구단에서 걸려온 그 전화를 ‘복귀명령’으로 받아들였다. 수화기를 놓자마자 짐을 쌌다.

“1987년 두 번째로 이탈리아에 갈 때 저는 현대 선수였는데, 구단에서 반대했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가고 싶었습니다. 유럽 배구계의 훈련이나 경기 문화에 강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선진 배구를 체험하고 싶은 욕망이 강했습니다. 구단에서는 어렵게 보내주면서 ‘나중에 현대가 필요로 할 때 반드시 돌아온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이 ‘조건’은 계약이 아니었다. 김 감독은 그러나 이 약속을 잊은 적이 없다. 현대의 전화는 그 전에도 여러 번 걸려왔다. 그때마다 “아직 더 배울 것이 남았다”고 사양했다. 그러나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을 때, 김 감독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김 감독의 복귀에 ‘금의환향’이란 표현을 사용한 언론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고생길에 들어선 셈이다.

김 감독은 금성통신에서 뛰던 81년 처음으로 이탈리아에 진출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배구의 메이저리그였다. 김 감독은 75년 태극마크를 달았고, 78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세계배구선수권 대회에서 한국을 4강으로 이끈다. 이탈리아 배구는 이 천재 세터에게 무려 3년 동안 쉴 새 없이 러브콜을 보냈다.

김 감독은 선수와 감독으로서 눈부신 업적을 쌓았다. 최우수선수상만 세 번 받았고, 외국인선수상까지 휩쓸었다. 1999년부터는 트리에스테·라벤나의 감독으로 일하면서 지도자로서의 능력도 인정받았다.

흔히 스타 플레이어가 스타 감독이 되기는 어렵다고 한다. 김 감독은 “일리 있는 말”이라고 했다. 스타 출신일수록 선수 마인드를 버리기 어렵다. 선수들을 보면서 “나도 하는데 이 정도도 못하나” 하고 답답해하고, 그래서 “내가 하는 걸 잘 봐” 하고 윽박지르듯 훈련하면 선수들은 용기를 잃어 경기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내의 조언을 들었습니다. 선수 시절엔 저만 잘하면 그만이니까 아내가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지도자가 된 뒤 아내의 조언을 귀담아듣습니다. 아내는 말했습니다. 감독은 선수일 때와 다르니까 스타가 아닌 동료로서 선수들을 대하라고.”

배구선수 출신의 아내 임경숙씨는 딸·아들과 함께 베네치아에 산다. 김 감독이 보기에 딸과 아들은 생김새만 한국인이지 속은 이탈리아인이어서 그곳에서 살아야 할 것 같다. 아들만은 한국인 아내를 맞았으면 싶지만 희망사항일 뿐, 이런 생각을 입 밖에 내본 적도 없다. 김 감독은 “저는 기러기 아빠가 아니라 펭귄 아빠 신세입니다”라며 웃었다.

김 감독이 현대캐피탈을 맡았을 때는 삼성화재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무려 9년 동안 남자배구를 평정했다. 김 감독의 부임, 그리고 현대캐피탈의 분발과 함께 삼성화재의 황금기도 막을 내렸다. 2005 V리그 우승을 마지막으로 권좌를 현대캐피탈에 내줬다. 삼성화재는 올 시즌에도 선두를 지켜왔지만 늘 현대캐피탈의 추격을 의식해야 한다.

현대캐피탈은 프로리그 3연속 우승에 도전하고 있다. 올 시즌엔 외국인 선수 없이 출발했지만 1월 31일 현재까지 3위를 달리며 선두권을 넘보고 있다. 외국인 선수를 뽑아야 하지만 눈에 드는 선수가 없어 국내 선수로 버티고 있다. 긴박한 상황이지만 “국내선수만 뛰는 우리 팀에 질까 봐 고심하는 다른 팀에 미안하다”며 여유를 보인다.
그러나 김 감독의 시야는 프로 코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세계 속의 한국 배구를 생각하고, 좋았던 시절을 재현하고 싶은 희망을 키우고 있다.

“제가 선수일 때 우리 배구는 테크닉으로 서구 팀을 제압하고 정상권에 올랐습니다. 선수도 좋았어요. 강만수·장윤창·강두태…. 이제 세계배구는 힘과 기술을 겸비했고, 한국은 약해졌습니다. 세계배구의 컨셉트는 ‘공격’인데 한국은 너무 지키는 배구를 합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장점인 수비를 더욱 강화하고 공격 배구를 접목해 다시 도전해야 합니다.”

김 감독은 삼성화재의 신치용 감독과 함께 명장으로 꼽힌다. 신 감독의 별명은 ‘코트의 제갈공명’. 사실 제갈공명은 실패한 지도자일지 모른다. 마지막 승리자는 사마의였으니까. 김 감독은 사마의가 아니지만 최후의 승리를 얻겠다는 생각은 분명하다. 그에게 신 감독은 “능력 있는 지도자고, 배구라는 큰 틀 안에서 뜻이 통하는 친구”다.

장래에 대해 물었다. 그는 “현장에서 ‘감’이 흐려지면 지휘봉을 놓겠다”고 말했다. 능력이 바닥나면 책임을 질 각오도 하고 있다. 그러나 배구를 떠난 삶은 생각해본 일이 없다. “감독을 그만둔 뒤에는 행정가로서 배구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후배들을 돕고 저변 확대에 조력하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기여다.

프로 감독이란 직업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자리다. 김 감독은 “나는 배구인이므로 스트레스도 배구로 푼다”고 말했다. 경기를 하면서 풀지 못했던 문제를 곰곰 생각해보고, 비디오를 통해 확인함으로써 의문을 해결하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희열을 느낀다는 것이다. 시즌이 아닐 때는 골프를 친다. 핸디캡을 묻자 간단하게 대답했다. “싱글입니다.”

김호철 감독은
▷생년월일=1955년 11월 13일
▷가족=부인 임경숙(50)씨와 딸 미나(24·배구선수), 아들 준(20·골프선수)
▷출생=경남 밀양
▷학력=경남 밀주초~대신중·고~한양대
▷주요 경력=1975∼86년 국가대표·1980년 금성통신·1981년 이탈리아 프로배구 파르마 진출(1981∼82년 우승)·1983년 유럽컵 우승·1984년 현대자동차써비스·1987년 다시 이탈리아 진출·1996년 파르마 감독·1999~2000년 라벤나 감독·2000년 트리에스테 감독·2003년 현대캐피탈 감독·2006년 남자국가대표팀 감독
▷취미=골프(핸디캡 싱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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