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우울한 초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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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 24면

기억하는가. 젊은 날,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던 경험을. 꿈꾸어왔던 것이 눈앞에 펼쳐졌다. 얼마나 간절히 희구하던 것이던가. 지금 당장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어려서, 준비가 안 돼서였다.

그렇다고 절망했던 것은 아니다. 곧 품에 안을 수 있으니까. 잠시 유보해둘 뿐. 그 순간 당혹스러워진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침이 고여서다. 욕심 냈다는 것을 남들이 눈치챌까 봐 조심스럽다. 뱉어낼 수는 없는 법. 얼굴에 홍조를 띠며 살짝 소리 나지 않게 삼켰다. 정말, 젊은 날의 아름다운 추억이다. 김애란의 소설들을 읽다 보면, 오늘의 청년들도 고인다는 것을 안다. 그 침이?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만두가게 하는 엄마가 피아노를 사주었다. 밀가루 풀풀 날리는 곳에서 피아노를 쳤다. 나이 들어 시큰둥해져 더 이상 치지 않았다. 그래도 피아노는 상징이었다. 교양 있는 딸로 만들겠다는 엄마의 자존심, 엄마보다 나은 여자가 되고 싶다는 욕심 따위가 피아노에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피아노는 이제 애물단지가 되었다.

차압 들어오기 전 값나가는 것 빼돌리자고 해놓고 보니 피아노밖에 없었다. 이 피아노를 서울의 반지하 자취방으로 옮겨야 했다. 비가 쏟아지더니 그예 일이 터졌다. 물이 넘쳐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퍼내도 소용없었다. 무릎까지 찰 정도가 되었을 때 피아노가 눈에 들어왔다. 뚜껑을 열고 건반을 누른다. 상상해보라, 그 방에 가득 찬 것이 설움 말고 무엇이었겠는가(‘도도한 생활’).

갈 곳 없는 후배하고 함께 살기로 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껌을 내민다. 사연이 있었다. 어릴 적 엄마가 도서관 휴게실에 앉혀둔 뒤 잠깐 기다리라 했단다. 책 빌려 올 텐데, 심심하면 씹으라고 껌 한 통을 손에 쥐여주었다. 기다리다가 껌을 씹었다. 그때 “입 속 가득 그윽한 침이 고여 자꾸 입맛을 다셨”다. 다섯 번째 껌 종이를 벗겨내고서야 엄마가 자기를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배는 말했다.

“떠나고, 떠나가며 가슴이 뻐근하게 메었던, 참혹한 시간들을 떠올려 볼 때면 말이에요… 지금도 입에 침이 고여요.” 보라, 거기에 탐식가의 미각을 만족시키는 침이 고이는 것은 아니잖은가. 너무 일찍 상처 입은 젊은이의 가슴에 쌓이는 설움과 원망이 있을 뿐이다(‘침이 고인다’).

사내가 혼자 자취할 적 이야기다. 연인이 생겨 그 방에서 몸을 섞었다. 화끈 달아올라야 하는데, 영 분위기가 따라주지 않았다. 동네 아이들 떠드는 소리, 채소 트럭에서 터져나오는 확성기 소리, 심지어 하수도 공사 하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그래도 사랑의 힘은 위대했다. 한창 ‘진도’ 나가다 갑자기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힘주어 말했다, 사랑해! 그녀가 대꾸하려 할 때 창밖을 지나는 아이들 무리에서 험한 말이 들려왔다. “씹탱아! 그게 아니잖아! 저 새낀 항상 저래.” 그때 사내는 생각했다. “아, 그 새낀 항상 그러는구나”라고, “진짜 나쁜 새끼네”라고. 이제 설움을 넘어 절망마저 가득 쌓인다(‘성탄 특선’).

되돌아본다. 우리 젊은 시절도 이토록 우울했던가를. 정치적으로는 탈출구가 없었다. 그러나 삶에 대해서는 낙관하고 있었다.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과 같았다. 생동감과 목표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김애란의 소설들을 읽고 있노라면,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는 희망도, 낙관도, 전망도 없어 보인다. 번듯한 직장을 잡은 주인공은 없다. 학원강사를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집도 없다. 고시촌에, 독서실에, 반지하에 산다. 오죽하면 이들을 가리켜 ‘88만원 세대’라 하겠는가.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칼자국’이라는 작품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칼국숫집을 꾸려가며 가족을 먹여 살리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 하면 칼이 떠오른다. 늘 반죽 썰고, 김치 썰고 했으니. 한밤중 주방에 들어가자 도마 위에 칼이 놓여 있었다. 그때 주인공은 참을 수 없는 식욕을 느낀다. 시렁 위에 있는 사과를 깎는다. “사과는 내 손에서 둥글게 자전하며 자신의 우주를 보여주고 있었다. 싱그러운 향기가 났다.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앞 세대의 희생과 양보 없이 다음 세대의 성장을 바랄 수는 없다. 더 이상 젊은 날의 초상이 김애란이 그린 군상처럼 우울하게 해서는 안 된다. 길을 열어주자. 아마도 앞 세대가 자신의 몫을 줄이기 위해 애쓰면 숨통이 트이리라. 그리만 한다면, 그들의 입안은 희망에 자극받은 싱그러운 침으로 가득하리라.


이권우씨는 책에서 스승을 만난 도서평론가로 서평전문잡지인 ‘출판저널’ 편집장을 지냈고 『책과 더불어 배우며 살아가다』『각주와 이크의 책읽기』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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