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浮沈의전말>3.朴성섭회장과 형제갈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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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덕산(德山)의 붕괴뒤에는 박성섭(朴誠燮.47)회장의 환상가적인 성취욕과 재산을 둘러싼 모자.형제간의 「미묘한 갈등」관계가얽혀있다.
박철웅(朴哲雄.83).정애리시(鄭愛利施.71)씨 부부는 학교법인 조선대등 교육사업과 고려시멘트등 기업경영을 통해 K그룹.
K언론사 등과 함께 호남에의 「빅3」을 일구었다.
朴.鄭씨부부는 슬하의 5남3녀에 대한 교육에도 남다른 열정을보여 주변으로부터 『자식농사도 잘 지었다』는 부러움을 샀다.장남 성철(誠哲.50)씨는 한양대를 다니다 독일(獨逸)유학(경영학)을 했고 8남매중 6명이 서울대를 나왔다.세 딸중 첫째는 서울대의대를 졸업한 소아정신과 의사로 남편이 고위공무원이며 둘째딸은 판사와 결혼했다.
다섯 아들중 이번 부도의 장본인인 둘째 朴회장은 경기중.고와서울대 법대를 졸업,부모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일찌감치 경영수업을 시작했다.72년 고려시멘트 서무과장으로 출발,아버지(총장)의 비서실장 등을 거치며 가업을 순조롭게 계 승하는듯했다.
그러나 朴회장은 78년 고려통운.고려자원개발.고려종합개발등 6개의 회사를 설립,경영하다 2년여만에 30억여원의 부도를 내는 바람에 어머니 鄭씨가 뒤처리를 한뒤 문을 닫았다.이를 계기로 朴회장은 81년 미국으로 가 홍성산업 현지법인 을 설립,시멘트수입사업을 벌이다 제품에 클레임이 걸려 소송끝에 12억원을변제하는등 좌절을 거듭했다.
80년대 중반 귀국해 어머니밑에서 고려시멘트를 운영하던 朴회장이 다시 독립해 그룹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朴前총장 일가가 조선대의 경영권을 잃은 88년부터였다.朴회장은 88년10월 어머니의 지원으로 광주에서 무등일보를 창간하고 한국고로시멘트의 경영권을 넘겨받은뒤 잇따라 덕산시멘트.덕산콘크리트.덕산요업등을 설립하면서 자신의 아호를 따 덕산(德山)그룹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뒤 마구잡이로 여러 부실기업을 인수,5년여만에 27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는 그룹총수가 됐다.그러나 이 과정에서 朴회장의 관심은 사업가적인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언론.정치에까지 손을 뻗쳤다.朴회장은 덕산그룹 출발 초기부터 「민주동 우회」라는 사조직을 만들어 조선대찾기 여론을 형성하는 외곽조직으로활용해오다 최근에는 전국조직인 「정의개혁범시민연합」으로 개편했다. 그는 사석에서 측근들에게 『30명의 국회의원을 거느리겠다』고 말하는등 정치권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朴회장의 성격과 업무스타일이 돌출적이고 즉흥적이어서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朴회장은 캐딜락승용차편으로 매주 3일씩 가족을 데리고 광주에 내려가 반드시 어머니 鄭씨와 함께 식사를 하는등 효심이 지극했으나 한편으로는 재정후원자인 어머니의 관심이 다른 형제에게 돌아갈까봐 매우 신경을 썼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7일 무등건설의 1차부도위기 때도 鄭씨가 현금 3백20억원을 지원하며 경영에서 손을 뗄 것을 요구하자 회사가 동생성현(誠賢.38)씨에게 넘어가는 것 아니냐고 당황해 했다는 것이다. 고려시멘트 사장이던 성현씨는 서울대정치학과를 거쳐 미국조지워싱턴대에 유학한후 「정보통신」이라는 컴퓨터 소프트웨어회사와 출판사등을 운영하다 고려시멘트등 집안사업에 참여했다.그러면서 어머니 鄭씨에게 형 朴회장의 무리한 사업확장을 자 주 경고해 형과의 갈등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성현씨는 대학 재학시절 학생운동권의 대부(代父)로 80년대중반 기자생활을 할때도 학생운동에 자금을 댄 것이 알려져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또 장남 성철씨는 독일유학후 미국에 머무르다 88년 부모가 조선대 경영권을 잃자 귀국,고려시멘트 회장으로 있었으나 경영과정에서 鄭씨와 마찰이 잦아 경영권을 성현씨에게 물려주고 시멘트중간재 업체인 홍성산업을 맡아왔다.
[光州=특별 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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