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y리빙] “꽃꽂이는 채움이 아니라 비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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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꽂으니 더 자연스럽게 보이죠?” 꽃꽂이 명인 임화공씨가 대사 부인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고 있다. 왼쪽부터 올가 추마코바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 부인, 임씨, 이리나 이바셴초프 러시아 대사 부인, 에스테르 아레야노 멕시코 대사 부인, 얀 돈코 오스트리아 대사 부인, 소니즈 메지아 에콰도르 대사 부인.[사진=양영석 인턴기자]

25일 오전 9시 서울 종로구 통의동 10번지. 영하 10도를 밑도는 날씨에도 각국 대사 부인을 태운 외교 차량 10여 대가 속속 몰려들었다. 꽃꽂이 명인 임화공(84)씨를 찾은 행렬이다. 이날 모임은 매주 열리는 ‘화공회’ 꽃꽂이 강습회였다. 화공회는 ‘임화공을 중심으로 모인 세계 속의 꽃 친구들’을 말한다.

 “튤립의 얼굴이 위를 향하도록 꽂으세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켜주는 것이 아름다워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임씨는 꽃꽂이에 한창인 파란 눈의 부인들 사이사이를 오가며 이들의 손길을 바로잡았다. 임씨가 능숙한 솜씨로 시범을 보이자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따라 했다. 29일 서울 웨스틴조선 그랜드 볼룸에서 열리는 78회 화공회 전시회를 앞두고 있어 분위기가 더욱 달아올랐다.

 이날 처음 나온 이리나 이바셴초프 러시아 대사 부인은 “꽃꽂이만큼 단숨에 집안 분위기를 살려내는 게 없는 것 같다”며 “집안 장식에 관심이 많은데 열심히 배워 앞으로는 직접 꾸며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임씨는 1958년부터 활동해 온 국내 최초의 꽃꽂이 강사다. 올해로 50년을 맞았다. 외국 대사 부인과의 인연도 48년째다. “60년 에번스 영국 대사 부인의 초청으로 대사관에서 꽃꽂이를 가르치기 시작한 게 지금에 이르렀네요. 그간 한국에 온 수많은 대사 부인에게 꽃 선생님 노릇을 했지요. 레이니 주한 미국 대사 부인처럼 본국에 돌아가서도 줄곧 잊지 않고 사는 이야기, 가족 사진, 꽃꽂이 사진을 담아 보내는 분들도 있어요.” 지금도 영국·독일·프랑스·스웨덴·노르웨이·카타르·오스트리아 등 11개국 대사 부인이 임씨에게서 배우고 있다.

 임씨를 중심으로 하나의 외교 네트워크가 형성된 셈이다. “민간외교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겠다”고 하자 임씨는 “그분들이 고국에 돌아가서도 한국을 아름다운 꽃의 이미지로 기억해 준다면 그걸로 족해요. 통의동 10번지가 다우닝가 10번지(영국 총리관저)보다 낫죠?”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2006년 외교통상부로부터 수교훈장 숭례장을 받기도 했다.

 꽃꽂이와 인연이 없던 주부들도 쉽게 응용해 볼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춥고 건조한 계절에는 화병보다 수반(쟁반처럼 낮고 바닥이 넓은 그릇)을 이용해 보세요. 집에서 사용하는 예쁜 접시나 도자기에 침봉(굵은 침이 꽂혀 있어 나뭇가지나 꽃의 줄기를 꽂아 고정하는 도구)과 물을 담고 여백을 많이 남기면서 드문드문 꽃을 꽂아보세요. 예쁘기도 하고 가습효과도 있어 지금 딱 좋아요.”

 

매화 가지 하나로 멋을 냈다(左). 수반에 꽂은 수선화와 카네이션.

그는 “기술은 중요치 않다”고 했다.
 “한 가지만 기억하면 돼요. 그림을 그릴 때 캔버스 가득 그리지 않잖아요? 마찬가지로 꽃을 꽂을 때도 점(點)·선(線)·면(面)·색(色)과 함께 여백이 중요해요. 빽빽하게 꽃을 꽂는 데만 신경을 쓸 게 아니라 공간을 어떻게 비울 것인가를 고민해 보세요.”

 물론 가장 중요한 건 꽃이다. “막 꽃망울을 틔운 매화 가지나 새 눈이 보송보송하게 오른 버들강아지가 제철이죠. 개나리·진달래 가지도 좋고요. 다듬어 화병에 꽂아두기만 해도 금세 집안이 환해져요. 굳이 꽃꽂이 기술을 배우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이죠.”

 임씨는 “오늘 새벽에도 고속버스터미널 꽃시장에 다녀왔다”며 “이 나이에도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은 늘 꽃과 함께 살아온 덕분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실제 그는 나이보다 스무 살은 어려 보이는 듯했다.

 “꽃을 꽂을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게 마음이에요. 자연과 가정을 아끼는 마음을 담아 꽃을 다룬다면 주부들이 저보다 낫지 않겠어요?”

이에스더 기자,사진=양영석 인턴기자

임화공씨가 전하는 꽃꽂이 비법

 -계절에 알맞는 꽃을 선택하자. 반 계절 정도 앞서는 꽃을 고르면 집안 분위기 전환에 도움이 된다. 장미가 능사는 아니다.

 -자연상태에서 자라는 모양대로 꽂는 게 좋다.

 -딱딱한 가지는 사선으로, 연한 꽃 줄기는 줄기와 수직을 이루도록 자른다.

 -물 자르기(꽃을 자를 때 물속에 넣은 채 줄기를 자르는 것)를 해준다. 공기 중에서 자르면 흡수공으로 공기가 들어가 물을 잘 빨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시간 물을 섭취하지 못해 시든 꽃에 효과가 있다.

 -화선지 위에 난을 친다는 생각으로 재료 하나하나에 정성을 기울여 꽂는다.

 -완성된 작품은 자주 물을 갈아준다. 햇빛과 바람이 잘 들지 않는 곳에 두면 오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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