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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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나는 근처의 돌멩이 하나를 발로 걷어찼다.조금 후에 퐁당 돌이 강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써니와 나는 강가에 나란히 서 있었고,써니가 간혹 띄엄띄엄 말했다. 『내가 아빠를 처음 본 건 막 중학교에 입학하고 난 여름방학 때였어.엄마는 미국에 다녀오자고 하면서도 아빠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그때까지 난 엄마에게 아빠에 대해서 한번도 묻지 않았는데… 그건 아마 어려서부터 은연중에 느낀 어떤 분위기때문이었을 거야.아빠에 대해서 말을 꺼낸다는 건 엄마와 나 둘다에게 이로울 게 없다는 결론같은 거….』 가끔 바람이 지나갔다.우리는 추워서 어깨를 움추리고 서 있었다.써니와 나는 한 두 발짝쯤 떨어져서 서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귀기울이지 않으면 써니의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리니까 어떤 남자 어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엄마와 그 사람은 어색하게 악수를 했을 뿐이었어.엄마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그 사람이 내게 말했어.자기가 내아빠라고.그런데 나는 사실 그 말을 듣기 전부터 그 사람이 아빠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어.』 나는 고개를 돌려서 써니를 쳐다보았다.써니는 말을 쉬면서 혼자서 고개를 천천히 가로젓고 있었다.나는 써니에게 춥지 않은지를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써니는 추위 따위와는 관계없는 것처럼 서 있었으니까.
『엄마와 나는 사흘 아니면 나흘 동안 샌프란시스코의 호텔에 머물렀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아빠가 호텔로 찾아와서 엄마와 나를,특히 나를 보살펴줬어.하루는 엄마가 몸이 안좋다고 해서 나하고 아빠 둘이서만 백화점에 갔었는데… 그 하루는 내가 그때까지살았던 모든 다른 날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행복했어.말이 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랬어.아빠는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걸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사줬거든.난 그 물건들보다…그것들로 해서 아빠의 애정을 확인 하는 게 더 신났던 걸 거야.아빠가 그때 내게 그랬어.나중에 너는 우주비행사나 그런 게 되면 좋겠다고.』 나는 고개를 숙이고 구두코로 강변의 땅을 톡톡 차면서 써니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써니는 내가 자기말을 듣든 말든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써니는 머릿속으로 지난날을 회상하다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또 말하고 그러는 것 같았다.
『아빠는 한번도 호텔에서 자고 가지는 않았어.그래서 나는 속으로 아버지에게 다른 여자가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런예측은 터무니없는 것이었어.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아빠에게는 더이상 여자가 필요없었던 거야.미국에 간 지 사흘짼가 나흘째 되던 날 밤,엄마는 나를 호텔방에 혼자 남겨두고 나가서 새벽이 돼서야 돌아왔어.그리고 날이 밝을 때까지 침대에 엎드려서흐느껴 울었어.그러니까 엄마는 그때 벌써 아빠가 더이상 여자를원하지 않는다는걸 안 것같아.그 날 아침에 엄마가 내게 말했지.한국에 돌아가자고.』 써니가 나를 쳐다보았다.나는 초승달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써니를 보고 한번 웃어주었다.써니가 이제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게 마지막이었어.아빠는 공항에도 나오지 않았는데 그건 엄마가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거기서 떠날 작정을 했기 때문이야.그러다가…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 5월이었어.맞지? 너하고마지막으로 보기 일주일 전쯤이었어.어떤 사람이 아빠의 소식을 가지고 나타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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