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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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써니가 일어나 욕실로 가서 칫솔질을 마치고 다시 창틀에 돌아와 앉았다.써니는 머리에 터번처럼 썼던 수건을 벗었는데 그러니까 머릿결이 촉촉하게 젖은 것이 아주 관능적으로 보였다.타월가운의 목아래에서 가슴 있는 부분까지가 살짝 벌어져 서 자꾸만 나도 몰래 시선이 그리로 갔다.
『넌 나쁜 년이야.넌 미쳤었거나… 아니면 지금도 미쳐 있는 거야.』 내가 써니에게 그렇게 말했다.써니가 잠깐 자리를 비운사이에 나대로 곰곰 따져보다가 내린 결론을 그대로 말한 거였다.써니가 놀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나는 담배꽁초를 휘익아래로 던져버리고는 또 말했다.
『2년 반이야.어느날 갑자기 네가 증발해버린 게 2년 반 전이야.너 때문에 울상을 하고 지내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구.그런데 넌… 미국의 아빠한테 가 있었다구? 넌마치 방학 때 시골집에 가 있었던 것처럼 말하지 만… 넌 너를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잔인하고 무식한 짓을 한 거라구.』 써니는 두 팔을 팔짱끼고 내 말을 경청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쳐들고 대꾸했다.
『아무도 나 때문에 울상을 하고 지내지 않았어.우리 엄만… 원래부터 그랬지만,이 남자 저 남자하고 어울려서 히히덕거리면서잘 살고 있어.우리 엄만 오히려 내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린걸 감사하고 있을지도 몰라.』 나는 일어나서 써니의 어깨를 양팔로 잡고 흔들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너희 어머닌… 너 때문에 혼이 빠져버린 사람 같았어.너희 어머니하고 난,니가 있을만한 곳이라면 전국을 다 뒤지고 다녔었어.화장터까지,정신병원까지 시체안치소도 돌아다녔구… 너를 찾기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구.내 말 알아들어?』 써니가 차갑게 웃었다.그리고 나를 쏘아보다가 내뱉었다.
『그건 주위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쇼에 지나지 않았을 거야.난내가… 그 여자의 딸이라는 사실이 끔찍하다구.속은 건 너야.』나는 써니를 거칠게 밀어버렸다.써니가 한쪽 벽면에 붙어 서서 나를 계속해서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방 한가운데에 버티고 서서 씩씩거리면서 말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죽으니까 갈 데가 없어서 돌아온 거로군.그래서 니가 팽개치고 갔던 사람들을 뒤에서 감시한 거로군.너한테는 사실 그럴 자격이 없어.너는 오히려,너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빌어야 해.지난날을 용서해달라고 말이야.』 『아니.난달수 너에게 나를 다 주고 떠났었어.』 『같이 잔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해.네가 눈 앞에서 없어졌는데… 한마디 말도 없이 말이야.』 나는 열이 올라서 근처에 있던 쓰레기통인가 뭔가를 집어서 벽에다 집어 던졌다.그속에 들어있던 내용물들이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난 너에게 다 주고 떠났어.적어도 몇년 쯤은… 니 속에 내가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그런데 넌….』 『넌 미쳤어 써니.넌 차라리… 돌아오지 않았던 게 더 좋았어.』 아 나는 미칠 지경이었다.써니가 한참만에 말했다.
『넌… 내가 없는데도… 불행하지도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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