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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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그녀는 써니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눈 앞의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써니는 마네킹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만약 눈조차 깜박이지 않았다면 나는 그것이 써니를 흉내낸 밀랍인형이라고오해했을 거였다.써니는 몇번인가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고 살짝,웃음인지 아니면 울음 직전의 찡그림인지 하여간 그런 표정이 써니를 스쳐갔다.나는 써니에게로 다가갔다.사람들이 길을 터주었다. 우리는 와락 서로를 부둥켜안았다.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아,써니가 살아 있고 내게 안겨 있는 거였다.나는 눈을 감아버렸다.내가 꼬옥 안고 있는 게 써니라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소 리도 들리지 않았다.
써니가 먼저 팔을 풀고 조그마하게 속삭였다.
『…여기서 나가.』 백화점 매장을 메운 사람들이 우리 주위를동그랗게 에워싸고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써니의 손을 잡고 사람들을 헤치면서 몇 발짝을 걸었다.
밖으로 나가는 길이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죠.밖으로 나가는 길이 어디죠?』 놀란 눈을 하고 우리를 구경하고 있던 유니폼의 아가씨들을 향해서 묻자 한 아가씨가손가락질로 출구를 가르쳐 주었다.
밖은 다행히 어두워져 있었다.우리는 무작정 인파 속에 섞여서길을 걸었다.가끔 내가 고개를 돌려서 써니를 쳐다보면 써니는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보여주었다.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걷기만 하였다. 『잠깐만… 난 먼저 갈게.너 혼자… 갈 수 있겠어?』양아가 나타나서 우리를 세우고 말했다.써니가 고개를 끄덕였고 양아가 우리에게 손을 한번 흔들어 보이고 뒤돌아서서 가버렸다.
우리는 신촌역 쪽으로 걸어갔는데,언제쯤인가 써니가 코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에 갖다대고 나서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걸었으므로 자연히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따로 나란히 걷게 되었다.그러자 약간 어색해져 버린 게 사실이 었다.
『우리 「날개」에 가볼까.아직도 있어.그 자리에.』 써니가 반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날개」의 창가쪽에 마주앉아서우리는 서로 쳐다보고만 있었다.나도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커피를 젓다가 써니가 고개숙인 채로 조용히 말했다.
『지난주에 여기도 와봤어.절두산 성당에도 가봤구… 마석에도 갔었어.우리가 거기 갔을 때 새벽에 건넜던 돌다리 기억나? 그건 없어졌더라구.』 아,나는 써니의 짧은 몇마디를 듣는 그 짧은 동안에,얼마나 많은 장면들을 한꺼번에 떠올렸는지 몰랐다.비오던 성당 뜰에서의 첫키스와,우리 참아… 라고 하던 어린 날 써니의 떨리던 목소리와,비 개어 깨끗했던 아스팔트를 걷다가 불어난 시냇물 위의 돌다리 위에서 사과를 나눠 먹던 새벽과….
『난 그런 데에 다시 가보지 못했어.널 찾기 위해서… 내가 그때까지 가보지 못했던 곳들을 많이 돌아다녔어.널 다시… 찾을수 있을까 하고.』 말하는데 갑자기 목이 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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