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하버드대 공부벌레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베스트셀러 소설 『사립학교 아이들』은 뉴욕 타임스와 하버드대를 교묘하게 비튼다. 대중의 관심을 끌려면 무조건 최일류와 맞붙어야 한다는 정석대로다. 순진한 여주인공 리 피오라는 뉴욕 타임스 여기자의 노련한 인터뷰에 말려 심하게 마음고생을 한다. 독자들의 입에서 “이런 나쁜 신문이 있나”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다. 뉴욕 타임스로선 기분 나쁜 소설이다. 그래도 이 책을 ‘2005년 가장 좋은 소설 5권’에 추천한 것은 뉴욕 타임스였다.

하버드대 이미지도 그다지 좋지 않게 묘사된다. 소설의 무대인 기숙학교에는 ‘학생회장=하버드대 합격’이 불문율이다. 여주인공이 남몰래 흠모한 학생회장 크로스는 알고 보면 바람둥이다. 리를 건드린 뒤 안면을 싹 바꾸고 다른 여학생에게 건너간다. 혼자 남은 리가 불쌍해진다. 그러고 나서는 어떻게 그런 뻔뻔한 친구를 받아들이는지, 하버드대가 한심해진다.
 
그런데도 하버드대 인기는 연일 치솟고 있다. 지난해 입학경쟁률이 11대1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지난해 전 세계에서 2만3000명이 지원했다. 이 중 80%는 ‘합격할 만한 조건’을 완비했다. 그중 절반은 ‘충분히 졸업하고도 남을 학생’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정작 합격한 학생은 1662명뿐이다.” 입학사정관 그레이스 쳉의 말이다. 충분한 조건을 갖춘 1만8000명이 그냥 미끄러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간다고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 대학 와이드너 중앙 도서관 책상에는 낙서가 무수하다.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도 성공은 성적순이다” “한 시간 더 공부하면 남편 얼굴이 바뀐다”…. 공부벌레들의 고민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낙서들이다.
 
지난해 하버드대 한국 유학생이 297명으로 세계 3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캐나다·중국보다 못하지만 영국·일본을 앞선다. 15년 동안 세 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그 어렵다는 하버드대에 들어간 우리 유학생들에게 우선 뿌듯한 자부심이 든다. 그러곤 이 숫자 밑에 깔려 있을 기러기 아빠의 눈물을 떠올리면 가슴이 시리다. 하버드대는 라틴어로 졸업식을 진행한다. 그리고 졸업일을 커먼스먼트(Commencement·출발) 데이라 부른다. 또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경쟁에 맞닥뜨리는 날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모든 성취는 치열한 경쟁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임 또한 진실. Te doy la gloria!(라틴어로 ‘그대들에게 영광이 있기를’)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