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春중앙문예희곡당선작>기차를 타고건넌 둥지하나 上.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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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편집자註:이 작품은 원래 원고지 2백20장분량이나 지면사정으로 1백20장으로 필자가 요약한 것입니다.독자여러분의 양해를바랍니다.
민효 민효 父 민효 母 민희 종수 정길 걸인 박씨 손님1,2민효,앉은 자세로 무를 다듬고 있다.
민효:하늘수박,가을바람,고추잠자리,신열이 나네,돌담에 속삭이던 무동가리… (잠시 멈추고 깎던 무를 쳐다본다) 무동가리…(다시 칼질을 한다) 하늘수박,가을바람,고추잠자리,돌담에 속삭이던 무동가리,신열이 나네,하늘수박,가을바람,고추잠자리,신열이 나네.(점점 빨라진다) (사이)고기 많이 잡힙니까? 조심해요.
몸 돌보지 않는 거,자랑할게 못되니까.어디쯤이죠.대서양,아니면인도양… 인도양이면 인도가 가까울 테고,대서양이면 카사블랑카가코앞이겠네.
저요? 무동가리 자르고 있습니다.아침 아홉시에 일어나 청소하고,시장 가고,화장실 치우고,배달 나가고,그리고 밥 먹고,눈치보고… 하루가 밥 세끼짜리 판박이예요.
(잠시)어쩌다 이런 생각이 들때가 있슴다.그때,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해양병원에서 검사 받을 때 색맹검사 순서였었죠.막상알록달록한 그 무늬판을 보니까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든 거예요.한번 나가게 되면 육지생활 평생 하기 힘들 것 같은 예감.무슨 말인지 아시겠죠.그래서 무조건 안 보인다고 했슴다.계속 안보인다고 잡아떼니까 오히려 검사하던 간호원이 안쓰러워 하데요.
속으로 우스웠죠.
정작 당사자인 나는 한시라도 빨리 그 곳을 나갔으면 하는데 간호원은 놔줄 생 각은 않고 두번이고 세번이고 자꾸 시키는 거예요.그래서 내가 먼저 얘기했죠.그만하면 됐다.그만하면 나도 알겠으니까 더이상 수고할 필요 없다구요.
그때 그 간호원의 얼굴표정.정말 볼 만 했었죠.왜 있잖아요.
불쌍하고 가여워 죽겠다는 표 정.그렇게 된 겁니다.얼굴도 못보고 그냥 온 거 죄송합니다.
(잠시)답답한 건 지금도 마찬가지죠.그렇지만 없는 신열을 억지로 앓는 것도 내키지 않아요.그래서 행복하냐구요? 불행한 것도 같아요.이건,내가 원하던게 아니예요.알고 계시죠?(휘파람 소리,처음엔 희미하게 들리다가 점점 또렷해진다.경 쾌하며 곡조가 귀에 익다)아버지예요.
널찍한 주방 가운데서 민효父가 요리를 하고 있다.
민효:저게 아버지의 주 레퍼토리예요.군가죠.아버지도 그냥 사시는 것 같지는 않아요.언젠가 내가 왜 군가만 부르시느냐고 물었는데,아버지 대답이 사람들이 전부 환자같이 보이신대요.생기라고는 없는 한길의 은행나무 가지들 같다구요.그래서 군가를 부르신답니다.행진풍의.
민효가 아버지의 휘파람소리에 맞춰 몇 소절을 따라 같이 분다. 민효:아버지는 베트남전 상이용사죠.
민효父:(손을 들어 파리를 쫓는다) 민효:(오른손의 검지를 들어 보인다) 손가락을 잃으셨죠.
민효父:세차장 외상값 받아왔니? 민효:사장이 안 보여요.
민효父:한 달이 넘었어.자장면 값 얼마나 된다고 계속 외상이야.그 사장놈 평판도 안 좋아.일하는 애들 월급 떼먹기로 소문났어.지가 언제부터 사장이야.그 인간 오팔팔에서 여자 팔아 돈모은 거 동네사람들이 다 알아.아침에 보니까 세차 하려는 차들이 줄을 섰더니만.너두 이제 신경 좀 써.
민효:아버지.
민효父:왜.
민효:저어,아버지.
민효父:왜.
민효:저 배 타면 안 될까요.원양선요.
민효父:이 기술 배우랬잖아.요리기술,이거 지금 대우받고 있는거야.직업훈련소 입소한 지 한 달도 못 돼 쫓겨나고,제대하자 마자 머리깎고 중 되겠다고 집 나가서 2년이나 소식 없다가,너전화온 데가 청량리 파출소였어.공부하기 싫어 배 운 게 없으면기술이라도 익혀야지.어떻게 허구한 날 도망칠 궁리만 하니.이 기술 배워 놓으면 평생 밥 굶을 걱정은 없댔잖어.
민효:(혼잣말)요즘 밥 굶는 사람 어디 있나요.
민효父:어서 옵쇼.민희엄마,손님 왔어! 전체 밝아지며 손님1과 손님2가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민효는 쪼그린 자세 그대로 무를 깎고 있다.
손님1:아무리 중복이라지만 이거 너무 하는구만.
민효父:덥죠?.
손님2:여기 얼음물 좀 줘요.
민효父:예.민희엄마 뭐해.
민효母:(소리)나가요.
손님2:빨리 좀 줘요.
민효父:민희엄마! 민효母가 옷매무새를 고치며 방에서 나온다.
민효母:미안해요.(주전자의 물을 컵에 따른다)뭘 드릴까.
손님1:난 짬뽕.
손님2:아 날 더운데 뭔 짬뽕이여.
손님1:술 아직 안 깼어.
손님2:냉면 되는가 모르겄네.
민효母:물론이죠.
손님2:그럼 글루 주시오.국물 많이 부어서.
민효母:홀에 짬뽕 하나,냉면 하나요.
민효父:(소리)오우케이.
손님2:국물 많이 부어서.
민효母:냉면 국물 많이 부어서요.너 아직 있었니? 민효:….
민효母:인 다오.식사 나오면 그 거나 날라라.
민효父:그냥 놔 둬.당신은 카운터에 가 앉아 있어.
민효母:이리 줘.
민효父:놔두라니까.신경 쓸 필요없어.언제까지 저러구 있는지,내 한 번 봐야겠으니까.
전화벨 소리 민효母:네 양자각입니다.네,네.라조기 하나.네.
볶음밥 셋이요?네에.저기요.옹달샘에 라조기 하나,볶음밥 세 개있어요. 민효父:오우 케이.(휘파람 소리) 민효母:잘 됐다.바람이라도 쐴 겸 배달이나 갔다 오렴.그건 이리 주고 음식 나올동안 방에 들어가 좀 쉬어.
민효,깎던 칼을 어머니에게 주고 방으로 들어간다.
손님2:아들이유? 민효母:네에.
손님2:나이가 몇인디.
민효母:먹을 만큼 먹었어요.
손님2:허,글쎄…적은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하기야 뭐 요즘 젊은사람들,서른은 돼야 제 자릴 찾더구만.
손님1:그 뭔 소리야? 손님2:내 말은,세상이 하도 잡스러우니까 정신 차리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여.하룻밤만 자고 나면 왼갖 신기한 것들이 쏟아지지 않는 감.나잇살 먹었다는 우리도 정신이 해롱해롱해질 판인디,젊은 애들이야 오죽 하겄어.여기서 차이고,저기서 밟히고,울고 불고,부모 가슴 땅구덩이까장 내려앉힌다음에야 정신 차리는 나이가 서른이더라 이 말이여.
손님1:철학적인 데가 있네.
손님2:다 경험이제.
손님1:아짐씨는 어떻게 생각하시요? 민효母:글쎄요.
손님2:자식한테 너무 바라는 거,그것두 좋지 않은 것이죠.
손님1:그런 사람이 인제 고등학교 다니는 계집애를 패대기를 쳐. 손님2:말을 안 들으니 그렇제.
손님1:그만한 나이 때는 미니스커트도 입고 싶고 영화도 보고싶어 할 나이야.딸이 비디오 본다고 온 동네가 시끄럽게 그 발광을 해.
손님2:종류가 있는 것이여.난 제목만 보고서 무슨 액션영화나되는 줄 알았다니께.근디 이건 완전히 홀딱쇼더마.누가 알까 챙피혀. 손님1:제목이 뭐였는데.
손님2:『홧김에』인가 뭔가.
손님1:그게 다 지 애비 닮아서 그런 거야.
손님2:이 사람이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여.
손님1:시끄러.머리 깎으러 심야 이발소만 골라서 가는 주제에. 손님2:허,이 사람이 증말.
민효母:왜들 그러세요.그러다 싸움 나겠어요.
손님2:말조심 혀.
손님1:됐어.그만해.
손님2가 물을 마시다 말고 민효母의 옷소매를 살핀다.
손님2:근데 아짐씨는 이 복중에 웬 긴팔옷을 입었디야.
민효母:(소매를 추스르며)몸살인가 봐요.
손님2:한여름에 감기몸살이라.밤에 에어컨 틀어놓고 주무시는가보네. 민효母:….
손님2:하여튼 요상한 세상이여.이 따슨 여름에 감기가 설쳐대질 않나.
손님1:(민효母의 눈치를 보며)거,냉면 한그릇 시켜 먹으면서웬 썰이 그리 많아.
민효父:(큰소리)자장,냉면.
민효母:예,(깎던 무를 대충 추스르며 손님들에게)식사 나왔네요. 민효父:(머리만 내밀고 식당 안을 둘러본다)민효 어딨어.
민효母:잠깐 심부름 보냈어요.
이때,방 안에서 뭐가 부서지는 소리.
민효父:저 상놈의 새끼.
민효父가 주방에서 나와 앞치마 두른 것을 벗어던지고 방으로 들어간다.방 안에서 민효父의 고함소리와 민효의 울음소리가 섞여들리고,막 식사를 하려던 손님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한다.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민효母.
무대 어두워진다.
-민희의 방 민효母가 야외용 가스레인지 위에 약을 데우고 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퇴근길의 민희.
민희:이게 무슨 냄새야.
민효母:이제 오니.
민희:지금 뭐하구 있는 거야.방 안에서.
민효母:너희 아버지 약.
민희:도대체 무슨 약인데 냄새가 이렇게 지독해.엄마 주방에서좀 하면 안돼?방에 냄새 배면 어떡해.
민효母:주방에 냄새 배는 거보단 낫잖아.손님들이 기분 나빠하면 어떡해.
민희:정말 못말려.도대체 무슨 약이야.어디 좀 봐.(냄비 뚜껑을 열어 보다 기겁을 하며)그게 뭐야.쥐 아냐? 민효母:두더지야.너희 아버지 병에 좋다구 해서.
민희:정말 내가 못 살아.못 산다구.이러다간 나중에 구더기까지 먹이겠어.엄마.아빠 병은 병이 아냐.전쟁병이란 거 엄만 몰라?그깟 두더지로 나을 병 같았으면 벌써 나았어.미국에서도 이미 포기한 걸 엄마가 그런다구 아버지 발작이 나아질 거 같애.
민효母:그럼 어떡하니.너네 아버지 언제 또 발병하실지 모르는데.그걸 생각하면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민희:엄마가 괜한 고생하는 거 같아 내가 안타까워서 그래.지난 달에도 중국산 약촌가 뭔가해서 사 온 거.그거 순 가짜였잖아. 민효母:사람이 워낙 안 돼 보여서 사준 거야.중국서 온 교포라고 해서 믿고 산 건데.가짜일 줄 누가 알았겠니.
민희:엄마.이렇게 사는 게 좋아? 민효母:무슨 얘기니? 민희:난 엄마가 한여름에 그 긴소매 입는 것두 맘에 안 들어.동네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잖어.화상자국이 그렇게 창피하면 수술 받으면 돼잖어.
민효母:니 아버지 약값 대기도 빠듯해.
민희:도대체 엄만 언제까지 아빠 걱정만 하며 살 거야.이젠 엄마두 아빠나 그런 흉터자국에 너무 얽매이지 말구 사는거같이 좀 살어.아빠도 그만한 연세시면 다른 사람들 만큼은 사신 거 아냐? 민효母: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너희 아버지 오십이야. 민희:….
무대 어둠.
-골방 기차소리.점점 가까워지다가 다시 멀어진다.
책상 앞에 앉은 민효.낡은 타자기 하나 놓여 있고 문 밖에서는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요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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