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느리게, 부드럽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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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 02면

서울 마포구 공덕동 제심관에서 기합과 함께 검도 수련에 몰두하는 오병철 관장. 신인섭 기자

꼭 10년 만에 만났는데 세월이 흘렀음을 알아차릴 수 없었습니다. 10년 전에도 취재 때문이었고, 이번도 여일한 까닭에 변화 모습을 요리저리 살폈지만 도리 없이 이쪽 편만 늙었음을 절감하고 말았지요. 검도 사범 오병철(70)씨는 청청했습니다. 칠순 나이는 숫자일 뿐이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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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벽에 걸려 있던 액자도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더군요. 강산을 휘달리듯 큼직한 마음 심(心)자와 ‘바위마음’은 다 오 사범의 솜씨죠. “제 멋대로 쓴 글씨”라고 겸손하게 손을 내저었지만 칼칼하고 속내가 배인 아주 독특한 글씨라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깁니다. 그가 이끄는 도장 이름인 제심관(制心館)에도 마음 심자가 들어가 있으니 어지간히 마음을 챙기는 분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제심(制心)’이란 마음을 다스린다는 뜻이죠. 오 사범은 10년 전 그 까닭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 사는 문제가 결국 마음에 달린 것이 아닌가 싶어요. 기술이든 운동이든 어느 경지를 넘어서면 자기 완성의 길로 들어서는 것인데 저는 그걸 ‘자유를 향한 행진’이라고 풉니다. 검도도 오래 반복해 숙련되면 아주 자연스러워지지요. 그게 작대기든 칼이든 자유자재로 거침없이 놀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도복을 정갈하게 입고 죽도를 든 그는 깃털처럼 가볍고 독수리처럼 날렵해 보였습니다. 그는 대학 시절 인혁당 사건과 통혁당 사건으로 연이어 옥에 간 아픈 사연을 품은 사람입니다. 무기수로 징역 20년을 살았는데 여느 사상범처럼 독방에서 지내지 않고 ‘징역 현장’에서 일반 사범과 뒤섞여 살았답니다.

대패를 밀고 옷을 만들고 인쇄기를 돌리면서 그는 마음을 편히 다스리려 노력했다네요. 그의 등 뒤로 육중한 쇠문이 닫혔을 때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는군요. “평생을 보내야 할 곳이니 즐겁고 건강하게 지내기로 하자. 여기가 세상이려니 하면 마찬가지 아닌가. 옥 밖 사람도 여기서 보면 거기에 갇혀 지내는 사람들이니.”

그는 옥 안과 밖에서 살아가는 방법,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검도와 함께 끊임없이 수련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핵심은 ‘철저하게 버리기와 비우기’입니다. 죽도 한 번을 내리치며 버리고, 또 한 번 내리 그으며 비운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실천 지침도 있습니다. ‘크게, 느리게, 부드럽게’입니다. 혹시 검도를 해 보신 분은 알겠지만 잘게, 급하게, 힘을 꽉 주고 죽도를 휘두르면 제 몸조차 보호하지 못합니다. 다른 운동도 이런 근본은 비슷하리라고 봅니다. 흔히 ‘어깨에 힘 빼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얘기입니다.

다시 10년 뒤 그를 만날 때는 ‘크게, 느리게, 부드럽게’ 마음 다스리기의 효험을 느끼고 싶습니다. 그가 들려준 마지막 인사는 다시금 ‘비우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젠 세 종류의 친구만 남았어요. 죽은 친구, 죽어가는 친구, 죽음을 준비하는 친구. 더 비우고, 더 버려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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