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미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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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호 25면

여자에게는 적당히 예쁜 옷이 필요하다. 물론 많이 예쁜 옷이 더 좋다. 하지만 그럭저럭 마음에 들지만 또 그렇다고 크게 끌릴 것도 없는 ‘소개팅남’의 애프터 신청에 나갈 때라든가, 화장 안 해도 예쁜데 상냥하기까지 한 아가씨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비디오 대여점에 갈 때, 당장 케이크를 먹지 않으면 치명적인 뇌 손상을 입을 것 같은데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는 쓸 만한 가게가 없다든가 할 때, 그러니까 후줄근해 보이기는 싫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신경 쓴 걸로 보이고 싶지 않을 때 입을 옷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은지의 쇼퍼홀릭

엉덩이에 금실·은실로 수놓은 벨벳 ‘츄리닝’이라든가, 나날이 진화하고 있는 고무줄 치마의 세계, 젊은 여자들이 입기 시작해 언제부터인가 나이든 여자는 물론 남자들까지 입기 시작한 이른바 ‘사파리 점퍼’ 열풍은 모두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내가 사파리 점퍼를 장만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3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당장 사 입지는 않았다.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 옷이 아니고서야 정가로 사면 왠지 밑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다렸다. 대대적으로 유행하는 옷은 한 철만 지나도 또 대대적으로 가격을 ‘후려치기’ 마련이다.

28만원짜리 가격표가 붙은 옷이 8만9000원에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당장 사지 않은 것은 한여름에 입어보니 쪄 죽을 것 같아서가 아니라, 같은 옷이 웹사이트에 7만9000원에 나온 것을 봤기 때문이다. 집에 와서 컴퓨터를 켜고 확인한 후 착각이라는 게 밝혀졌지만 적당히 열이 식기도 해서 백화점으로 도로 뛰어가지는 않았다.

그해 겨울은 물론 다음 해에도 새 가격표가 붙은 사파리 점퍼가 속속 등장했다. 하지만 베이지색·카키색·푸른색·회색·보라색 사파리 점퍼들은 뚱뚱해 보이거나 얼굴이 누렇게 떠 보이거나 너무 얇거나 너무 비싸거나 해서 마음에 쏙 들지 않았다.

올해도 그렇게 지나가나 보다 생각하던 어느 날, 한 번도 나를 배반한 적 없는 야성의 감을 느꼈다. 지하철역과 연결돼 있어서 여름에는 에어컨을, 겨울에는 히터를 쬐기 위해 반드시 들르는 동네 백화점에서였다.

96NY 균일가전. 요즘 같은 때 옷값에서 50% 할인, 70% 가격다운이니 하는 것은 소용없다. 무조건 ‘균일가’가 최고다. 매장에서 하는 것보다는 행사장을 따로 차리는 게, 그것도 건물 안보다는 바깥에 난전을 펼친 쪽이 쓸 만한 걸 건질 확률이 높다. 하지만 물 좋고 정자도 좋은 곳이 어찌 흔하랴. 마음에 드는 옷은 사이즈가 빠졌고, 잘 맞는다 싶으면 안감이 찢어졌고, 새 옷이나 다름없었던 것은 다른 손님이 옷 갈아입느라 벗어놓은 옷이다.

그러다 마침내, 내 사파리가 나타났다. 태그를 보면 카키색이라는데 아무리 봐도 짙은 회색이다. 허리선은 잘록하게 들어간 곳 없이 헐렁하고, 안감은 분리할 수 있고, 기쁘게도 토끼털 트리밍 대신 양털 칼라가 달렸다. 거기다 가격은 3만9000원, 완벽하다. 집에 와서 덧붙인 가격표를 떼 보니 원래는 36만8000원이었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은 그들의 것이니라.


정은지씨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일한 경험으로 쇼핑의 경제학에 관심을 갖게 된 자유기고가로 『모피를 입은 비너스』 『피의 책』 등을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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