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를가다>2.회교난민촌 물.식량도 바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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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전쟁은 인간이 연출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비극이다.그러나 이 비극의 가장 처절한 대목은 연출자나 주연들이 전쟁을 치르는동안 이유도 모르는 채 희생을 강요당하는 어린이.부녀자.노인등조역들의 참상이다.
보스니아내전의 참상을 알아보기 위해 회교도 난민수용소를 찾았다. 이곳을 방문하기 위해선 우선 유엔보호군(UNPROFOR)이 발급하는 프레스 카드가 필요했다.편집국장의 서명으로「中央日報가 이 카드의 사용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진다」는 내용을 명시한 신분확인서를 서울에서 직접 팩스로 보내라는 것이 었다.
28일 오후 택시를 전세내 크로아티아와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인들의 거주지역인 자칭「레푸블리카 세르브스카 크라이나」(세르비아系 크라이나 공화국)의 접경도시 카를로바츠로 갔다.지난 90년 전쟁으로 거의 폐허가 된 카를로바츠 남쪽 끝 크로아티아군 검문소에서 택시기사는 더이상 갈수 없다며 걸어서 국경을 넘으라고 했다.1㎞쯤 걸어 가자 두번째 검문소가 나타났다.크로아티아군과 유엔군이 장갑차 5대와 중화기로 도로를 3중 봉쇄하고 있었다.프레스 카드를 내밀자 폴란드출신 의 한 유엔보호군 병사가『한국기자는 처음』이라고 미소를 지으며 철조망 횡목을 들어「크라이나공화국」에「입국」시켰다.다시 2백여m를 지나 다리를 건너자 투라뉴라는 마을이 나타났다.바로 이곳이 비하치지역의 내전을피해 도망온 회교난민 1만 7천명이 수용된 최대규모의 난민캠프였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아요.단지 배가 너무 고파요.엄마.
아빠와 함께 하루빨리 집에 돌아가서 지금 전쟁에 나가있는 두 오빠와 함께 살고 싶어요.』 길을 안내해 주겠다고 나선 스와다카라이치(20)양은 비하치 부근의 벨리카 클라두샤에서 지 난 8월 이곳에 온 이후 목욕 한번 제대로 못하는등 생지옥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4㎞ 남짓한 도로양쪽 주택들은 성한 집이 하나도 없었다.대부분 총탄자국이 얼룩진 반파 이상된 폐허였지만 한집에 수십명씩 살고 있었다.집에 사는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었다.카라이치양의집은 주차장으로 3평남짓한 크기에 사촌 2명과 함께 살고 있었다.거리엔 이들 난민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한쪽 다리가 잘린채 목발을 짚고 다니는 부상자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카라이치양은『남녀의 성비(性比)는 1대16이어서 남자들은 행복하다』며 농담도 했다.성한 남자들은 전쟁터에 나가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오후 4시가 되어 날이 어두워지자 곳곳에 연기가 피어 올랐다.전기가 끊겨 영하의 추운 밤을 나기 위해 땔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때대는 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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