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K수사발표] 제 꾀에 넘어간 김경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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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이면계약서는 김경준씨의 승부수였다. BBK 사건은 유령회사와 해외 자금세탁이 등장하는 등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러나 김씨가 "이명박 후보가 BBK 지분 100%를 보유했다"는 계약서를 제시하면서 BBK의 진실게임을 단순화했다. 진짜라면 이 후보는 치명타를 입을 수 있고, 위조라면 김씨의 주장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약서가 가짜로 판명되면서 부메랑으로 돌아와 김씨는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게 됐다.

최재경 특별수사팀은 "김씨가 미국에서 3년여 동안 각종 소송을 하면서도 이면계약서를 한 번도 미국 법원에 낸 적이 없다"며 "내용이 중대한 만큼 이면계약서의 진위를 검증하는 데 수사력을 집중했다"고 말했다.

우선 수사팀은 계약서에 있는 주식 거래가 실제 있었는지를 검증했다. '2000년 2월 21일 이명박 후보가 BBK투자자문의 발행주식 100%인 61만 주를 LKe뱅크 대표 김경준에게 49억9999만5000원에 넘긴다'는 내용의 진위를 따지는 일이었다. 이 거래가 성립하려면 이 후보가 2000년 2월 21일 이전에 BBK 주식 전체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검찰은 당시 금융감독원과 세무서에 신고된 BBK의 지분변동 내역과 LKe뱅크법인 계좌에서 49억9999만5000원이 실제 거래됐는지를 확인했다.

하지만 거래한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홍종국(48) 전 e캐피탈 대표와 이덕훈(62) e캐피탈 대주주로부터 결정적인 증언을 확보했다. e캐피탈이 99년 9월 BBK 증자에 참여해 이면계약서를 작성한 2000년 2월에는 주식 60만 주(98.4%)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실제 BBK-e캐피탈 간 자금내역에서도 이 거래를 확인했다. 두 사람의 증언으로 계약서 내용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난 것이다.

<중앙일보 11월 30일자 1, 4면>

동시에 김씨의 어머니 김영애(71)씨가 제출한 계약서의 감정에도 들어갔다. 대검찰청 문서감정실은 계약서에 찍힌 이 후보의 인영(印影.도장이 찍힌 모양)뿐 아니라 종이 재질과 활자체, 인쇄에 사용된 잉크까지 감정했다. 감정 결과, 계약서에 사용된 인영이 이 후보의 등록인감도, 이 후보가 LKe뱅크에 맡겨서 사용하던 업무용 인감도 아닌 제3의 도장이었다. 업무용 인감이 사용된 2000년 6월 14일자 금융감독원의 e뱅크증권중개 설립 신청 첨부서류에 찍힌 도장과 인영이 다르다는 결론을 냈다. 당시 BBK에 근무했던 김모(31)씨는 검찰에서 "김씨의 부인 이보라씨가 2000년 7월 이명박 후보의 업무용 도장과 같게 도장을 파오라고 지시해 도장을 만들어 건넸다"고 진술했다.

이면계약서가 당시 김씨의 회사에서 사용된 레이저 프린터가 아닌 잉크젯 프린터로 인쇄된 사실도 드러났다. 김씨 회사에서 일했던 직원들을 불러 조사하고 물품구매 서류를 뒤져 프린터의 종류를 확인했다. 결국 김씨는 "계약서의 실제 작성 시점은 적힌 날짜(2000년 2월 21일)보다 1년여 뒤인 2001년 3월께 작성한 것"이라고 실토했다.

정효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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