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발전 모델부터 개혁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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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보편적인 것은 이제 중심부인 유럽이 아니라 주변부인 동아시아로부터 태어날 것이다.』일본(日本)의 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에 접한 김지하(金芝河)시인의 코멘트다.
좀 역설적인 해석이 될지는 모르나 그의 이같은 코멘트는 아시아가 세계에 통용되는 보편적 가치의 본고장으로 등장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금 이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고있는 보편적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하나의 외 침처럼 들린다.사실 우리에게는 지금 총체적 부실(不實)과 총체적 재난을 극복하기 위한 근본적 대책으로 보편적 가치의 시급한 정책화와 제도화가 요구된다.
연일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터져나오고 있는 총체적 위기의 뒤숭숭한 사회적 분위기를 1960년대 초반 민주당 정권의 사회적 분위기에 비유하는 움직임마저 있다.하지만 오늘의 국민 생활은 그 당시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윤택해졌을 뿐만 아니라국가의 기반 또한 튼튼하다.다만 서로 유사한 점이 있다면 아마두 시기가 다 같이 시대적 전환기의 시련을 극복해야 할 무거운과제를 짊어지고 등장했다는 점일 것이다.
장면(張勉)정권은 통치능력 부재(不在)로 자유당 정권의 붕괴후에 탄생한 민주적 정치 질서를 5.16 군부 권위주의 체제로넘겨주는 전기(轉機)를 제공했다.역(逆)으로 김영삼(金泳三)정권은 지난 30여년간 지속돼온 한국형 발전 모델 의 문제점들을청산하여 오늘의 총체적 위기를 보편적 가치에 토대를 둔 선진 한국사회 건설의 전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金정권은 가혹한 시련에 직면해 있으나 이 시련을「새로운 탄생의 고통」으로 받아들여 신한국(新韓國)건설의 전기로 만들려는 각오와 용기가 요구된다. 지난 30여년간 한국 근대화의 견인차 역할을 한「한국형발전모델」은 군부-관료-기업의 유착에 바탕을 둔「관료적 권위주의」모델이었다.재화와 용역의 수급이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의 룰에 의해 결정되기보다는 정부의 규제.특혜,그리고 담합 과 같이보편적이지 못한 거래 관행이나 제도에 의해 조정되는 체제였다.
성수대교 붕괴로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이같은 관행과 제도에 바탕을 둔 한국형 발전 모델의 체질이었다.겉으로 보기에는 경쟁적인 시장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속 내용을 들여다보면 정부와 기업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기업간.노 사간의 관계도 좋게 말하면「발전 지향형」협조체제요,나쁘게 말하면 정경유착의 연결 고리로 얽혀있는 부패구조였던 것이다.이러한 발전 모델이 용케도 잘 작동함으로써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해 세계로부터 제3세계 발전의 성공적인 모델로 평가되 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앞서가는 일본과 뒤따라 오는 중국(中國)에 끼여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모색해야 할 우리로선 무조건「하면 된다」는「우리식」발전 모델의 성공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보면 안된다.「하면 된다」는 식의 성공 모델은 이제 과거의 것이 되었으며 내일의 발전에 오히려 방해가 됨을 인정해야 한다.이는 어디까지나물량적 생산 증가와 생활의 질적 향상이 등식화되던「따라잡기」식산업화 시기의 발전모델이었다.
이제 생산과 생활간의 모순이 전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오늘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단기적 실적이 아닌 공정한 절차와 룰을 중시하는 새로운 발전 모델이 필요하다.
***세계보편 價値 적응을 어떤 사람들은 이 총체적 위기의 극복을 위해 우리의 의식개혁을 부르짖는다.물론 의식개혁도 중요하다.그러나 과연 우리의 의식에 근본적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같은 한국 사람들이 만든 외국의 빌딩과 다리가 국제적인 찬사를받을 수 있는 가.
보다 시급한 것은 한국형 발전 모델의 핵심을 형성해온 정부와기업의 체질 개선이다.선진사회의 문턱에 서있는 정부로선 우리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불공정하고 비합리적인 부패 체질을 발본색원하여 투명하고 공정한 시장질서를 구축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이러한 질서 구축의 전제는 관료체제의 개혁을 통한행정의 투명화와 서비스화일 것이다.
기업도 불공정한 관행과 제도에서 하루 빨리 탈피해 국제적으로평준화되고 보편화된 제도와 룰 위에서 이익 극대화를 도모하는 방향으로 행동 양식을 바꿔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까지 앞으로 2년,선진사회로의 노정(路程)에는 험난한 난관들이 도사리고 있다.하지만 세계에 통하는 보편적 가치의 정책화와 제도화 속에선 한강의 추락과 같은 후퇴는 없지 않겠는가.
〈서울大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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