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변해야미래가산다>8.끝 평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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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평준화 정책의 시발은 60년대 후반「망국병」으로 불린 과외열풍을 몰고 온 중입.고입.대입등 3단계의 입시지옥 현상에서 그연원(淵源)을 찾을 수 있다.
어린 국민학생들이 일류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심신의 발육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과외공부를 하며 입시경쟁에 시달리자 69년부터 중학 입시를 무시험제로 전환,71년까지 전국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중학 무시험 전형으로 진학 희망자를 모두 받아들인 결과 늘어난 중학생은 더 극심한 고교입시지옥을 겪어야 했다.
중학교는 팽창했으나 고교의 수용능력은 크게 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도가 성공했다고 판단한 정부는 이와비슷한 방법으로 고교평준화 정책을 전격 채택했다.
74년 서울과 부산을 시발로 공.사립을 포함한 인문계 고교에학군을 설정하고 연합고사로 입학 자격자를 선발한 뒤 학군별 추첨으로 학생을 배정했다.
고교평준화 정책 시행을 둘러싸고 세칭 일류고교 동문들의 집단반발등 여러가지 잡음이 뒤따랐다.
무엇보다 평준화 정책을 실시하게 된 동기가 당시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아들인 지만(志晩)군을 일류고교에 입학시키기 위한「술책」이라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고 지금까지도 의문부호가 지워지지 않고 있다.
당시 문교부장관이었던 민관식(閔寬植)씨는 이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절대 아니다.그렇게 해서 지만군이 당시 세간에서 제일 좋다는고교에 들어갔느냐.
과열과외등 독버섯 같은 입시 부작용을 일소하기 위해 소신을 갖고 추진한 정책이었다』고 말했다.
고교평준화지역은 81년까지 전국 21개 도시로 확대됐으나 갖가지 문제점이 나타나 90년부터 군산.목포.안동.춘천.원주.이리.천안등 7개 도시에서 평준화가 해제됐고 현재는 14개 도시에서만 계속 유지되고 있다.
〈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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