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中 양쯔강 개발 사업권도 놓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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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회장은 중국 베이징 시청에서 베이징시가 추진하는 기간산업 프로젝트를 동아가 맡는다는 MOU를 체결하고 기념촬영을 했다(오른쪽에서 넷째)

이코노미스트
모두 동아의 회생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기업의 주체는 아니더라도 경제를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저마다 동아의 회생을 기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최원석 회장은 꿈과 현실 사이에서 무던히도 가슴앓이를 했던 것 같다.

그는 결코 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라도 동아의 부활을 위해 자신이 일궈온 회사에 자신이 응모한다는 기막힌 수모를 감수하면서 최고경영자 공개모집에 응모했고, 파산절차를 중지하고 강제화의를 인가해 주도록 법원에 신청서를 내기도 했지만 끝내 모든 것이 허사가 됐다.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최 회장이 그때를 회상할 때는 집무실 조명 불빛에 스치듯 눈물이 반사되어 보였다.

“동아가 이렇게 쓰러져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요. 동아의 생명이 절규하듯이 나를 찾는 것 같았소.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환자들의 숨소리를 들어본 적 있어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숨을 겨우겨우 이어가면서 살고 싶다고 매달리는 환자들이 떠올랐소. 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외침들이 환청처럼 막 들리는데 어떻게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소. 채권단의 이기심 같은 건 이미 머리에서 지우고 오직 내 모든 걸 던져 동아의 생명만은 이어가도록 해주고 싶었던 거요. 기업에도 생명이 있어요. 그걸 안다면 기업이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50년 넘게 이어온 기업을 그렇게 죽이려고 하는 건 죄악이야. 내가 지은 죄가 있다면 나를 처벌하고 기업을 살려달라고 애원도 했어요. 신도 회개하는 자에게는 다시 걸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데 인간이 절대 안 된다니 그런 오만이 어떻게 있을 수 있소. 주총에서 내가 다시 회장에 취임했다고 알려졌을 때는 각국에서 많은 사람이 위로 전문과 전화를 걸어와서 꼭 성공하라고 격려도 했어요. 정말 살리고 싶었소.”

기업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소액주주가 최 회장을 다시 대표이사에 복귀시켰다면 그것은 주주로서 경영능력과 권한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최 회장은 절망의 늪을 헤어나지 못했다. 경영권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최 회장의 요구는 대주주의 권리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 회사를 이끌고 갈 경영권이었고, 그것이 파산을 진행시키는 것보다 국가의 부담을 덜 수 있는 기회 제공이 된다면 차선의 방법일 수 있겠다는 것이 여론이기도 했지만 채권단은 끝내 외면한 것이다.

리비아는 최 회장 끝까지 믿어

-살릴 수 있는 회사였다고 말씀하시는 건 회사를 살릴 수 있는 구체적인 복안이 있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는데, 회사를 정상화시킬 복안이 있었다는 겁니까?
“나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언론에서도 보도가 됐지만 타부리 주한 리비아 대사가 건교부 차관한테 파산이 된다는 전제를 하고서도 실체만 있으면 동아에 대수로 공사를 맡기겠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면서 ‘한국 정부가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어요. 그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해요. 리비아는 변함없으니 (동아를 살리는 건)한국 정부에 달렸다는 얘기 아니오. 그러니 나한테 경영권만 회복해 줬으면 자연스럽게 동아와 리비아는 관계복원이 된다는 얘기였고, 그랬으면 5차까지 진행되는 대수로 공사니까 동아가 그동안 기반도 있었고 축적된 경험도 있으니까 무엇보다 리비아에서부터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 아니오.”

이 부분에 대해 정부의 시각은 그렇지 않았다. 대표이사를 공개모집 한다고 했을 때부터 금감위 관계자는 최 회장의 주장을 불신했다. 최 회장이 복귀하면 ‘리비아 대수로 공사 추가 수주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그럴듯한 구실에 불과할 뿐 믿기 어렵다’고 일축한 것이다.

물론 국가기관인 금감위의 관계자로서는 근거를 가지고서 ‘구실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솔한 발언을 했다고밖에 볼 수 없지만, 리비아 정부와 동아가 3차 공사 이후의 모든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 공동출자로 ‘DAM’을 설립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만큼 최 회장의 주장에 설득력이 실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또 다른 방안도 가지고 있었습니까?
“중국 ‘남수북조’ 공사를 수주해서 동아의 정상화를 조기에 이뤄낼 수도 있었소. 벌써 몇 해가 흘러버렸는데, 그 당시엔 수주를 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언론에는 공개가 안 됐지만 중국은 96년부터 우리한테 접촉해 왔어요. 실제로 내가 남수북조 문제로 몇 차례 중국을 방문했었고. 그러고 별도로 베이징시하고는 기간산업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MOU까지 체결했어요. 그것도 작은 사업이 아니었소.”

최 회장은 동아의 회생을 위한 복안으로 그동안 몸에 지니듯이 가지고 있었다는 프로젝트들을 공개했다. 그 내용들은 들을수록 만만치가 않았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최원석이라는 인물의 인지도와 활동 범위가 이렇게까지 폭넓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가 싶어 새삼 반문을 해보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중국 프로젝트는 규모에서부터 압도적이었다.

-처음 듣는데 남수북조 공사라는 게 뭡니까?
“중국 북부지역을 관통하는 프로젝트지요. 기상예보를 통해서도 많이 알려졌지만 중국 북부 지역은 만성 가뭄에 시달리고, 양쯔강 지역은 매년 범람으로 큰 수해를 보고 있잖소. 그걸 중국은 어떡하든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어요. 그래서 가뭄과 홍수,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양쯔강 물줄기를 인공수로를 통해 북쪽으로 돌리는 공사를 계획했는데 그게 ‘남수북조’ 공사요.”

-그렇다면 지금은 이미 공사를 진척시키고 있겠군요?
“내가 명예회복을 위해 기회를 달라고 했을 때만 해도 (중국 측이)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로서는 그런 복안이 있었으니까 동아 회생을 자신했던 것이고. 물론 지금쯤은 상당히 진행됐을지도 모르지만 수로만큼은 아무나 돌릴 수 있는 공사가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하고 있는지 나도 궁금해요. 그때 중국 측 인사는 2004년에나 2005년에 발주를 할 거라고 했는데 그게 리비아 대수로 공사하고 거의 비슷해요. 사하라가 아니라 중국이라는 점이 다르지만 공법은 유사한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중국 수리부에서 수차례 리비아 현장을 방문하면서 높은 관심을 보였던 거요. 내가 퇴임했는데도 초청장이 와서 중국 사람들하고 사업 전반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공사비만 160억 달러(약 15조원) 규모였어요.”

▶93년 6월, 서울그랑프리 탁구대회에 참석한 중국 자오즈민(가운데), 북한탁구협회 서인생 회장(오른쪽)과 환담하는 최 회장. 최 회장은 대한탁구협회 회장 때 세계선수권대회를 석권하고 체육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런 정도의 규모라면 가뭄과 수해만 해결하겠다는 차원이 아닌 것 같은데요? 양쯔강 유역의 200km 삼협 협곡이 삼국지의 무대가 돼서 유명하기도 하지만 10년 전인가, 양쯔강 일대를 옥토로 만들고 세계에서 가장 담수량이 많은 싼샤댐을 건설한다고 해서 중국이 들썩거리기도 했던 곳 아닙니까?
“바로 거기지요. 1차 물막이 공사가 97년에 끝났는데 댐의 완공 시기는 속도를 내고 천재지변이 없을 경우 2009년으로 잡고 있다 했어요. 댐이 완공되면 높이가 175m에 폭이 11km, 길이가 600km에 달하는 거대한 인공 호수가 생기고 그 댐에서 나오는 발전량이 최대 1820만㎾로 잡고 있었으니까 중국 전체 발전량에 비하면 11% 정도 되겠지만 우리나라 전체 발전량하고 거의 맞먹는 거예요. 좌우간 양쯔강 유역에서만 3억5000만 명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니까 남수북조 공사가 핵심 프로젝트였던 거요.”

-결과적으로는 양쯔강 일대를 전부 개발하려고 중국이 회장님과 협의를 시작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글쎄요, 전체는 모르겠고. 양쯔강 댐 건설도 전체 개발의 일부분이겠지만 우리한테는 양쯔강 북부지역을 가뭄에서 해방시킨다는 목표로 남수북조 공사를 맡아 달라고 했는데, 양쯔강 전체 개발이야 근대 300년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고 중국의 국부로 불렸던 손문(孫文;쑨원)선생이 1919년에 산업계획의 일환으로 처음 제안을 했다는 거 아니오? 그러고도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거니까 그게 160억 달러로 해낼 수 있는 프로젝트겠어요? 그걸 다 하자면 몇 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투자재원도 천문학적으로 필요할 거요. 하여간 우리가 맡으려고 했던 남수북조 공사도 그중의 하나였지만 중국이 그 일대를 아시아 최고의 제조업 심장부로 변모시키겠다는 거니까 보통 야심은 아니지요.”

-그렇다면 중국이 대수로 공사에다가 원자력발전소까지 건설한 다양한 경험이 있는 동아의 기술력이나 노하우를 더 원할지도 모르는데 남수북조 공사만 발주하고 끝내겠습니까.
“물론 공사를 해나가다 보면 각종 부수적인 부대사업을 추가로 수주할 수도 있겠지요. 실제로 세계 각국의 수주전이 몇 년 전부터 치열하게 전개됐고 2~3년 전에 들으니까 7억4000만 달러짜리 수력발전소 발전설비를 스위스·노르웨이·프랑스가 연합한 컨소시엄이 따냈다고 합디다. 우리가 공사를 했다면 원자력발전소도 건설했는데 수력발전 설비 정도야 쉽게 먹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하여간 남수북조만 수주했어도 동아 회생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였을 거요.”

입찰 결과는 신만이 안다고 했다. 그러나 동아가 정상화됐으면 중국 측이 그동안 최 회장에게 가졌던 관심을 감안할 때 세계 어느 기업보다도 비교우위에서 앞섰을 것이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리비아를 제외하고 수로건설을 국가 프로젝트로 삼았던 나라가 없었고, 그것을 성공시킨 기업이라면 동아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가정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실체를 무시하고 곧잘 또 다른 가정을 내세워 부정적으로 일축하겠지만 중국이라는 나라는 가능성이 없는 곳에 특사를 파견하지는 않는다.

중국은 그동안 접촉해 왔던 최 회장이 1998년 5월 현직에서 사임하자 곧바로 수리부 안에 ‘중국 대수로청’을 발족하고 2001년 12월부터 2002년 중순까지 중국 수리부의 책임자를 특사로 파견해 적극적으로 최 회장 영입을 시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어떤 형태의 영입이 됐건 선택은 최 회장에게 일임했지만 최 회장은 법적 문제가 매듭지어지지 않아 고사했고, 그러면서도 중국의 초청으로 수리부를 방문, 대수로 공사에 관한 자문에 응한 것은 사실로 확인됐다.

이때 논의된 내용이 리비아 대수로 공사와 동일한 콘크리트 특수관 매설공사며 공사비가 약 160억 달러로 추산됐다는 것이다.

中, 최 회장 영입 제안

-워크아웃이 됐을 때나 법정관리로 갈 때 중국의 남수북조 공사에 대한 수주 가능성만 밝혔어도 상황이 달라졌을지 모르는데 왜 그런 언급은 일절 없었습니까?
“내가 개인적으로는 굴곡이 깊은 삶을 살아왔지만 대한민국을 창피스럽게 만드는 일은 평생 한 번도 해오지 않았소. 사재를 털어서라도 국가 명예를 세울 수 있는 일을 했으면 했지 나라 망신시킬 일은 안 했소. 나는 자부해요. 탁구협회를 이끌고 사상 처음으로 세계 속에 태극기를 흔들었고, 해외 건설시장에서 땀 흘리고 있는 근로자들이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가지라고 수십 명의 연예인을 중동지역으로 보내 위문공연을 한 것도 내가 제일 먼저였소. 돈만 있으면 하지? 그럼 돈이 없어서 내가 나설 때까지 아무도 못했소? 국가 명예를 빛낼 문화예술인을 돕자고 200개 기업체를 모아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를 창설한 것도 나였소. 자랑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살아왔는데, 내 입으로 나라 망신시킬 얘기를 해요?”

-그런 말씀을 한다고 왜 국가 망신이 된다는 겁니까?
“내 입으로 그런 얘기를 하면, 남수북조 공사를 미끼로 내가 꼼수라도 부리는 줄 알고 당장 채권단과 정부를 농락한다고 할 거 아니오. 진실을 진실이라고 하는데도 진짜 진실인지 확인하느라고 몇 년씩 허송하는 나라에서, 발주 공고도 나오지 않은 프로젝트에 수주할 가능성을 언급해요? 그랬으면 채권단부터 비아냥거리고 중국에 조회하고 얼마나 수선을 피웠을지 모르지. 그렇게 되면 내 꼴은 뭐가 되고 결국 중국에서 한국 정부나 금융기관을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겠소. 그런 창피가 어디 있겠어요? 실제로 외교 사안이긴 했지만 한·중 수교 논의가 있었을 때 김석우(당시 아주국장, 전 통일부 차관)씨라고 하든가? 그 특사가 베이징을 드나드니까 우리 언론하고 야당에서 수교 논의가 진짜인지 확인을 요구하고 법석을 피워 결국 중국 외교부에서 논의를 잠시 중단해야 되겠다는 말까지 나오지 않았어요? 그건 중국에 대한 예의도 아니지만 우리 국민들 체면도 형편없이 손상시키는 거 아니오. 나는 그런 얘기들도 들어왔기 때문에 팩트(진실)가 아닌 것을 팩트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계속>

이호·객원기자·작가[leehoo52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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