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샌드위치 탈출' 후쿠야마 교수의 처방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2면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어 샌드위치 신세가 돼 가고 있는 한국 경제의 돌파구는 우수한 인재 양성뿐이다."

세계적인 석학인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SAIS) 교수의 진단이다. 최근 서울서 열린 글로벌포럼에 참석한 그를 25일 정덕구 니어(NEAR.동북아연구소)재단 이사장이 만났다. 다음은 '변화하는 세계와 한반도'를 주제로 대담한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정덕구=냉전이 끝난 후 '팍스 아메리카나(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 유지)'가 오랫동안 지속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중국.러시아 등 대륙 세력의 빠른 부상으로 도전받고 있는데.

▶후쿠야마=이라크 전쟁은 유일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의 한계를 보여줬다. 미국이 행사할 수 있는 힘은 줄어들고 있다. 미국의 헤게모니(패권)는 앞으로도 점점 쇠퇴할 것이다.

▶정=중동뿐 아니라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민족주의 노선도 미국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동북아에서 미국 입지도 크게 약화됐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 후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미국과 국제기구의 문제해결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예전만큼 신뢰하지 않는다.

▶후쿠야마=미국은 외환위기 당시 공정한 방식으로 위기에 개입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시아 국가는 월가 금융기관들이 외환위기를 시장개방 수단으로 악용했다고 생각한다. 미국과 아시아 간에 큰 인식 차가 존재하는 것이다. 아시아는 이후 미국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강화했고 외환보유액은 크게 늘었다. 여기에다 최근 들어 세계경제를 움직일 수 있는 힘도 아시아 쪽으로 눈에 띄게 이동했다.

정덕구 이사장

▶정=아시아 주요국이 참여하는 동맹체제 구축은 가능하다고 보나.

▶후쿠야마=미국의 역할이 중요할 텐데 아직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다. 중동과 테러 문제로 바빠 아시아의 신 안보체제 문제는 우선 순위에서 밀리고 있다. 미국은 일본과의 동맹을 확고히 하고 중국의 부상을 달가워하지 않는 호주.인도와 전략적 동맹을 체결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는 당연히 중국의 반발을 불러온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 주요국이 참여하는 공식적인 안보체제 구축은 어려울 것이다.

▶정=한반도는 아직도 '북핵 위기'라는 터널 안에 갇혀 있다. 6자회담에서 북한이 핵 프로그램 폐기에 동의하면서 터널 끝에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후쿠야마=현재의 북한 정권이 버티고 있는 한 터널 탈출은 어렵다고 본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한반도가 통일돼야 완전히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은 조그만 수단 하나라도 있으면 국제사회와 협력하기보다 방해하고 싶어한다. 북한 지도부가 현재의 불합리한 체제가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릴 수 있느냐, 외부세계에 얼마나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느냐가 관건이다.

▶정=최근의 남북 정상회담은 북한 정권이 점진적으로 개방에 나설 수 있다는 희망을 던져주고 있다.

▶후쿠야마=한반도 내부의 정치문제라 말하기 조심스럽다. 다만 북한과의 최고위급의 대화보다는 사회적 교류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대화채널 유지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상회담을 토대로 한 각 분야 교류 확대는 북한 사회 변화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정=한반도 통일 이후의 동북아 안보질서에 대한 논의도 시작되고 있다.

▶후쿠야마=일본은 남북한 통일 후의 군사력이 자위대의 10배 정도가 될 것으로 본다. 통일 한국의 군사력이 일본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란 시각도 적지 않다. 남한이 실제로는 북한의 핵 보유를 은근히 즐긴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도 많다. 결과적으로 핵무기가 통일한국의 소유가 될 것이란 생각에서다. 이런 우려를 논의할 대화 채널이 마련돼야 한다.

▶정=최근 한국은 일본 등 선진국과 빠르게 쫓아오는 중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라는 평가가 많다. 여기서 탈출하는 방법을 조언한다면.

▶후쿠야마=궁극적인 해결책은 우수한 인력을 양성하는 수밖에 없다. 세계는 계속 변화하므로 한국의 노동력도 거기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 개개인의 기술이 전체 경쟁력을 좌우한다. 이 기술을 끌어올리는 방법은 교육이다. 뛰어난 교육을 통해 다른 나라보다 노동과 기술 수준을 끌어올리는 게 중요하다. 염두에 둬야 할 것은 글로벌 경제의 규모는 거대하다는 점이다. 한국이 일본이나 중국보다 잘할 수 있는 분야가 분명히 있다. 우수한 인력을 바탕으로 상대적 우위를 누리는 틈새 시장을 찾아야 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55)=일본계 3세로 현재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SAIS) 교수다. 코넬대(고전학)와 예일대(비교문학)를 졸업했으며, 하버드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 국무부.랜드연구소를 거쳐 1992년 "이데올로기 대결의 역사는 자유주의의 승리로 끝났다"고 주장한 '역사의 종언'을 발표, 유명해졌다. 힘의 외교를 주장하는 미국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에게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라크전을 전후해 네오콘과 결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6년 출간한 '기로에 선 미국'에서는 "네오콘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과도한 군사적 수단을 동원했다"고 비판했다.

☞◆정덕구(59) 이사장=고려대 경영대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재무부 국제금융국장, 재경경제원 기획관리실장, 재정경제부 차관, 산업자원부 장관과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을 거쳤다. 현재 동북아 문제를 다루는 니어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대담 = 정덕구 이사장

정리= 염태정·최지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