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조백일장>초대시조-박기섭 가을노래 시작노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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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지난 여름의 더위가 하도 혹독했기에 「가을 노래」를 읊조리는일조차 송구스럽다.하나 한 잎 오동잎 아니라도 가을은 이미 가을인 걸 어찌하랴.그럴싸 그러한지 창밖의 산빛은 한결 은근하고,하늘은 사뭇 높아만 간다.이맘때의 하늘에서 느 끼는,저 잘 닦아놓은 놋쇠 항아리의 질감이라니! 그어 놓은 못자국이야 단지미묘한 마음의 시늉에 지나지 않는 것.
맑은 가을빛 아래 흐느끼는 은발의 억새.그리고 그 너머로 바라다뵈는 山役.이처럼 우리네 삶의 애상을 뼈저리게 드러내는 풍경이 또 있을까.정녕 목숨이란 한낱 진흙덩이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나는 이쯤에서 지난 한 철 애면글면 꾸려온 남루를 벗고 싶다.이 가을엔 어디 대바람소리 스치는 山寺라도 찾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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