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자주 실용 외교 상징 구한말 주미공사관 매입 추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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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수도 워싱턴엔 대한제국의 비운을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 있다. 대한제국이 1891년 설치한 '대(大)조선 주(駐)미국 화성돈(華盛頓.워싱턴) 공사관'(사진 1면)이다.

빅토리아풍으로 지하 1층, 지상 3층인 이 적갈색 건물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가자 공관으로서 수명을 다했다.

1910년 8월 망국과 함께 역사에서 퇴장했다. 이 건물은 현재 개인의 주택으로 쓰이고 있다. 외관은 놀랍게도 대한제국 시절의 수려한 균형미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정부는 잊혔던 이 역사적 건축물을 매입하겠다는 입장을 22일 밝혔다.

지난 수년간 재미 동포들이 이 건물을 매입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모금액이 부족해 중단된 상황이다.

이날 국회 통일외교통상위 국정감사 업무보고에서 이태식 주미대사는 "우리 민족의 뿌리 찾기와 역사의식 고양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그 건물을 매입해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대사는 "구한말 주미 공사관을 확보하게 되면 한국문화 전시실, 한국자료 도서실, 이민사 전시실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권태면 워싱턴 총영사는 "200만 달러면 역사적 건물을 확보할 수 있는 만큼 정부 차원에서 재원을 마련하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제국 공사관=대한제국이 외국에 유일하게 설치한 상주공관이다. 상하이 임시정부와 다른 차원의 특별한 역사적 가치를 갖고 있다. 자주를 내세운 약소국의 고뇌와 좌절, 실용외교의 전략과 한계가 담긴 건물이다.

1888년 고종은 박정양을 워싱턴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했다.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을 외교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박정양은 처음에는 세를 들어 사무실을 썼다. 그가 부임한 지 3년 뒤인 1891년 고종은 당시 거금인 2만5000달러의 내탕금을 꺼내 외교가(街)였던 로건 서클의 건물을 샀다. 그게 바로 이 건물이다. 대한제국의 유일한 외교공관이다. 자주 실용외교의 상징인 셈이다. 당시 공관에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사진이 걸려 있었으며, 누군가 이를 소장하고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 뒤 5명의 전권공사와 8명의 변리공사가 그곳에서 공관장으로 근무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공사관이 폐쇄됐다. 1910년 망국(한일병합) 직전 일본 정부는 조선에 5달러를 주고 건물을 강탈한 뒤 미국인 개인에게 팔아 버렸다.

이후 일제 36년과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한국인의 기억과 역사책에서 사라졌다. 80년대 후반 일부 역사학자들이 이 건물의 존재를 알렸다. 한국 정부는 오랫동안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건물은 백악관에서 북동쪽으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주소는 15 Logan Circle NW Washington D.C.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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