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틴경제] Q: EU가 FTA협상에서 요구하는 ‘지명 표시제’가 뭔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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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Q: EU가 FTA협상에서 요구하는 ‘지명 표시제’가 뭔가요

A: ‘비엔나 소시지’ ‘보르도 와인’ 처럼 유럽 지명 딴 상품명 못 쓰게 하는 거죠

지리적 표시제(geographic indication)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말이 좀 어려운데 지명 표시제로 바꿔 부르는 게 더 좋을 것 같네요. 현재 진행 중인 유럽연합(EU)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 EU가 지명 표시제 시행을 강도 높게 요구하고 나섰다고 합니다. 지명 표시제란 쉽게 말하면 우리나라의 ‘보성’이나 ‘하동’과 같은 지역 명칭을 제품 앞에 붙이는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무 이름이나 붙여도 되는 건 아니죠. 그 지역 이름만으로도 제품의 품질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명성이 있는 이름이어야 합니다. 지역 이름이 곧 브랜드가 되는 거죠.

예를 들어 설명해 볼게요. 흔히 ‘보르도 포도주’라고 하면 고급 포도주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는데요, 여기서 보르도는 포도주 상품명이 아니라 프랑스의 지방 이름입니다. 보르도에서는 포도를 많이 재배하는데 그 포도로 만든 포도주가 다른 지역의 포도주와 다른 특별한 맛을 가지고 있다고들 합니다. 덕분에 ‘보르도 포도주’는 프랑스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됐죠. 보르도 포도주라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비싼 값에 사갈 정도가 된 겁니다. 샴페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 말로는 ‘샹파뉴’라고 하는데, 샹파뉴 지방에서 만들어지는 발포성 백포도주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다보니 ‘샹파뉴’라는 프랑스의 지방 이름이 발포성 백포도주와 동일한 이름으로까지 인식되는 것이죠.

◆세계무역기구(WTO), 지적재산권으로 인정=지명 표시제에 대해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유럽에서 자유무역이 성행하면서라고 합니다. 유럽 국가들이 자국의 지역 특산품이 다른 나라에서 위조돼 팔리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이죠. 이후 1880년 파리협약, 1892년 마드리드협약, 1958년 리스본협약 등을 거치며 강화돼 왔던 이 제도는 1986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서 다자간 협상 의제로 채택됩니다. 그리고 1995년에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의 부속협정으로 ‘무역 관련 지적재산권 협정(TRIPs)’이 채택되면서 지명 표시가 특허권·의장권·상표권과 함께 지적재산권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한 지역의 자연환경과 인간이 빚어낸 공공의 재산이라는 의미죠.

하지만 WTO 소속의 모든 나라가 이 지명 표시제에 적극적인 것은 아닙니다.

미국이나 호주처럼 신대륙 국가들은 지명 표시제 상품 보호에 소극적입니다. 짧은 역사로 인해 세계 시장에 내놓을 만한 지역 특산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그런 나라에서는 지명 표시제보다는 상표권을 우선합니다. 미국의 어느 회사가 ‘코냑’이란 이름의 맥주를 만들어서 상표를 등록했다면 그 회사는 상표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미국에선 문제가 안 됩니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상표권보다 지명 표시가 우선합니다. ‘코냑’을 프랑스 코냑 지방에서 나는 증류 포도주로 규정하고, 다른 곳에서 나는 맥주는 물론이고 포도주에도 코냑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습니다.

◆한·EU 자유무역협정(FTA)의 ‘뜨거운 감자’=한·미 FTA에서 지명 표시가 별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던 것은 미국이 지명 표시에 큰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EU FTA에선 사정이 좀 다릅니다. EU는 지명 표시제를 농식품 품질 정책의 골간으로 삼고 있습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EU 회원국에는 지명 표시 대상 품목이 수없이 많은 데다, 이들 품목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것이 다른 나라의 저가 농산물과 가공품의 공세를 이겨내는 길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EU에는 2003년 현재 4800개의 상품이 지명 표시가 등록돼 있습니다. 이 중 프랑스에서 생산되는 593개 품목의 매출액은 연간 190억 유로, 우리 돈 24조원에 달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13만8000개의 농업법인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는 120억 유로(15조원), 스페인은 35억 유로(4조원)의 소득을 올립니다. 지명 표시의 브랜드 파워도 대단합니다. 지명 표시 제품으로 등록된 프랑스산 치즈와 그렇지 않은 치즈는 kg당 2유로 정도 차이가 납니다. 이탈리아의 투스카노 올리브유는 1998년 지명 표시 상품으로 등록을 한 후 종전에 비해 가격이 20%가량 높아졌다고 해요.

요즘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4차 한·EU 협상에서 EU는 700여 종의 지명 표시 품목을 한국에도 적용하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포도주나 위스키 정도만 주장할 것이란 당초 예상을 뒤엎고 전체 농식품에 지명 표시제 실시를 요구한 것입니다. 이 경우 국내에서 고유명사처럼 쓰이고 있는 샴페인·코냑·보르도 등 주류에 붙이는 명칭뿐 아니라 치즈나 소시지에 흔히들 붙이고 있는 파르마·프랑크푸르트와 같은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협상 결과를 봐야겠지만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유럽의 지명 표시와 상충되는 한국의 등록 상표를 파악하고 구체적인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협상을 통해 지리적 명칭의 사용 범위를 좁히고 허용 기간을 최대한 확보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죠.

EU는 1994년 호주와 와인 협정을 맺어 유럽의 지명 표시가 호주 내에서 일반 명칭으로 사용되는 것을 단계적으로 폐지하기로 합의했고, 2003년에는 캐나다와 와인 및 증류주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여 일반 명칭으로 사용되는 21개 와인 명칭을 3단계에 걸쳐 폐지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박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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