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호의 Winning Golf<20>] ‘그분’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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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호 17면

“지난주에 90대 가까이 쳤다니까요.”

“전혀 믿어지지 않는 샷인데요.”

“정말 참 이상하네. 오늘 ‘그분’이 오신 것 같아요.”

이 사람의 말을 믿어야 할까. ‘오늘만’ 샷이 잘된다는 사람이 있다. ‘오늘의 주인공은 나’라고 믿고 나갔는데 이렇게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 “허허, 허허” 하다가 18홀을 끝내게 된다.

“샷이 예전 같지 않아요. 요즘 연습 좀 하나 봅니다.”

“최근에 너무 바빠서 연습장에 가질 못했어요. 얼마 전에 어디선가 레슨 칼럼을 한 대목 읽고 그걸 따라 했더니 좀 맞네요.”

이런 얘기를 들으면 ‘나는 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레슨 칼럼 한 토막을 읽고 그렇게 잘 치는데 이번 라운드를 앞두고 없는 시간을 쪼개가면서 ‘칼’을 갈고 나온 나는 뭔가.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 친분이 있어 상대의 실력을 대충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이 하는 말의 참뜻을 금세 알 수 있다. 예전의 라운드 경험을 되살려보면 어느 정도 비교가 될 테니까. 평소 내공과 달리 정말 ‘그분’이 오셔서 일을 내는 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유독, 오늘 샷이 잘된다’고 말하는 사람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면 자신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많은 주말 골퍼는 자존심 때문에 상대의 내공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자네나 나나 50보 100보”라면서. 50보 100보라고? 50보와 100보의 차이는 무려 50보다. 싱글 골퍼끼리의 라운드는 1~2타 차 싸움이지만 고수와 80대 골퍼의 라운드는 눈 깜짝할 사이에 10~15타 차 이상 벌어져 일방통행이 된다.

필자도 얼마 전 “유독, 오늘 샷이 잘되네요”라는 말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싱글 골퍼인 라운드 파트너가 19오버파(91타)를 치는 사이에 필자는 14타나 적은 5오버파로 경기를 마쳤다.

‘그분’은 아무에게나 오는 것일까. 사실 골프는 절대 그냥 ‘오늘만 잘되는 경우’가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바로 ‘그날 그분’을 위한 숱한 좌절의 시간에 대한 보상일 것이다. ‘오늘의 한 샷’을 위해 준비하고 또 준비하지 않고서는 그분을 영접하기가 쉽지 않다.

필자가 아는 서울의 한 선배는 연습을 하루도 거르지 않는다. 단 10분을 훈련하더라도 연습장에 간다.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인 짧은 드라이브샷(평균 220야드 안팎)을 만회하기 위해서다. 단타자인 그가 70대의 안정적인 스코어를 유지하는 것은 연습 덕분이다. 단타자임을 스스로 깔끔하게 인정하고 퍼팅 등 쇼트게임에 승부를 걸기 때문이다. 그 선배도 종종 “오늘은 좀 샷이 되는구먼!”이라며 씩 웃는다.

그 웃음의 의미는 뭔가. 상대를 압도하고 있다는 자만심의 웃음인가. 그렇지 않다. 그동안의 꾸준한 노력이 헛되지 않고 ‘그분을 또 모시게 됐다’는 자기 만족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거기에 덤으로 전리품까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골프는 한 가지 애틋한 속성을 지닌다. 골프란 남몰래 사랑을 키워야 할 일이다. 내놓고 연습 많이 한다고 자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세간의 누구처럼 남몰래 너무 깊은 사랑을 키우다 그만 직장에서 흠을 잡히는 잘못은 저지르지 말자.

<브리즈번에서> JES·일간스포츠 골프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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