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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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더 먼 곳을 향하여(42) 잠들듯 엎드려있던 명국을 딸의 목소리가 깨웠다.아버지,그러심 안 돼요.엄마여기 있어요.
캄캄한 어둠이 걷히는 듯,눈을 감고 있는 명국의 의식 저편으로 아내의 모습이 떠올라왔다.
당신이군.그래도 당신이 와 주었군.
아내의 얼굴을 명국은 오래오래 바라보았다.그녀가 말했다.
못난 양반.울기는요.당신 나이 헛 드셨구려.
어쩌겠소.못난 내 꼴이.겨우 이거라오.우는 거 밖에 달리 할게 없구려.
차라리 소리소리 지르며 땅을 치든가,남자가 무슨 눈물을 보이고 그러신답니까.
부끄럽소만 눈물이 나오.그렇다오.죽기가 억울해서가 아니오.사람구실을 못하고 가는게 그게 한스러워서요.무슨 미련이 남아서도아니고,차마 두고 가기 아쉬운 원통함이 있어서도 아니라오.당신한테 사람 구실 사내 구실 한번 제대로 못하고 가는 게 그게 부끄러워서요.용서하구려.못난 놈 만나…고생만 많았소.
아내가 말했다.
당신답지 않게 무슨 그런 약한 소리를 하우.오늘 못맨 밭고랑내일 매면 되는 거고.낮이 짧으면 달 뜨길 기다려 마치면 되는거고.당신도 헛 사셨구려,농사 일이 가르치는 게 바로 그런 일,세월 기다리는 법 아닙디까.호랑이한테 업혀가 도 정신은 놓지말라는데,이제 맘 다잡아서 정신 차려요.아이들 생각을 해야지요.부모 됐으면 자식 혼사는 치르고 눈을 감아도 감아야지요.사람도리는 하고 죽어야 눈을 감는 거 아니던가요.
아내의 모습이 멀어져 갔다.모래바람이 불어 문창호지를 때리듯이 솨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가물가물 의식을 잃어가면서 명국은 이상스레 편안함을 느꼈다.잠이 쏟아져왔다.달콤하기까지 한잠이었다.
그때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자면 안 돼요,자면.
쉬고 싶구려.이렇게 졸릴 수가 없어.묶어 가도 모르게 졸립군그래. 그냥 그렇게 계시구려.내 애들 보내리다.자식 길러서 뭐하겠소.그만 했으면 이제 그애들도 제 앞가림은 하게 다들 컸는데,애들이 가서 당신 안아올려줄 테니 잠시만 기다리시구려.
애들을 보낸다구? 여기가 어딘데,여긴 살아서는 못나간다는 섬인 걸 몰라서 하는 소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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