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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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더 먼 곳을 향하여(38)부모가 피 섞고 살 섞어서 버젓이 불알 두 쪽 채워 사내로 세상에 내 놓았으면,그게 다 제몫을 하라고,제 구실을 허라고 허신 일이 아니겠나.그런데 조선땅에서농사꾼이 불알 두 쪽 차 봐야,무슨 구실을 허드 냐 그말이지.
명국은 눈을 치뜨며 캄캄한 어둠 속을 지켜보았다.안 그렇던가농사꾼 한해 살이가 어떻던가 말일세.세상에 뭘 못해서,얼마나 지지리도 못 났으면 처 자식 밥 굶기며 사는 걸 팔자로 돌리겠다 그말인가.아서라 이 사람아,이제 와서 농사라 니,농사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군 그래.
그래도 그게 아니지.뽕나무 길을 허청허청 걸아가고 있는 사내를 향해 명국은 안타깝게 소리쳤다.이 사람아 날 두고 가면 어쩌나.내가 하는 말은 그런 속에서 하는 게 아니라네.
한이 남아서 그러는 걸세.실한 농사꾼,된 농사꾼… 배운 거 그거밖에 없는데,모내기 철에 소 연장얹어 써래질 할 땐 번쩍번쩍 나르고,소나기 내리쳐도 꼴짐 하나는 실하고,품앗이를 가도 남의 집 일이라고 건성 넘기질 못 해 뒷설거지까지 하고 손털어야 직성이 풀리던 자네 아닌가.
허튼 소리.자넨 속아 산 걸세.세월이 이럴 때는 물에 떠가는가랑잎처럼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였네.아무 것도 속이질 못하는게 농사일인데 그게 이런 드난살이 같은 세상에서 어디 사람이 견딜 짓이더냐 말이지.그래도 참 자넨 못 말릴 사람이구먼,그런농사를,그놈의 농사를 그래도 한번 더 짓겠다니.
눈앞이 흐려지면서 푸르던 뽕나무길이 잿빛으로 멀어져갔다.그 사이로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명국은 팔을 벌리며 소리쳤다.아니,너 영실이 아니냐.딸아이의 얼굴이다.목이 메이며 명국이 소리친다.네가 어떻게 여기를… 다 나왔니.
영실이 말한다.검정 몽당치마를 바람에 나부끼며 딸아이가 달려나오며 말한다.아버지가 오시는데,마중 나왔지요.
딸아이는 달려오는데,그러나 그 모습은 가까워지지가 않았다.그만큼의 거리에서 그만큼의 모습으로 딸아이는 내내 서 있다.온 힘을 다해 명국은 딸아이에게 손을 뻗는다.안 되겠구나,안 되겠어.얘야,애비는 그냥 여기서 이러다가 끝■가 보다 .
아주 먼 곳에서처럼 딸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왜 그래요.여기까지는 오셔야 해요.아버지 잖아요.아버지는 올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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